출애굽기강해

[읽기 쉬운 출애굽기강해]#24. 10:1-20. "메뚜기 재앙"

이헌교 2022. 1. 17. 17:16

 현재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출애굽기를 읽으니까, 그 당시 애굽인들의 열 가지 재앙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의 의학이나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하더라도 전 세계가 조그마한 바이러스에 굴복하는 것을 보니 인간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번 코로나 사태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열 가지 재앙처럼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들에게 오는 고난 대부분은 우리들의 죄의 결과물로 인하여 온다고 했습니다.

 고난에 대하여 묵상을 해보니 가장 큰 고난은 나의 내면에서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 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전쟁에서 패하여 나의 본성이 나를 움직일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하나님의 임재함을 잘 느끼지 못하면 고난은 그냥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생각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86세에 났고 99세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무려 13년간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86년 만에 낳은 이스마엘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졌을 것입니다. 그럼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무엇이 제일 큰 고난이었을까? 아마도 이스마엘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어찌 잘못되면 아브라함은 아주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신앙이 자라니 이삭까지 하나님께 바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삭까지 바치는 단계까지 데리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것보다 더 큰 고난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고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고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거나 소원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면 그 어떤 곳도 우리에게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덟 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입니다. 이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은 재앙의 목적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쳐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10: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나님이 애굽에 여러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가 9:16에 나타나는 두 가지 이유 외에 한 가지 더 본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10:4,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를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그 당시 애굽인들은 메뚜기떼의 습격을 신의 천벌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당시 애굽인들의 수준에 맞게끔 재앙을 내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10:5,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우박 재앙 시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않아서 우박 재앙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 곡식 또한 메뚜기의 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고난을 주실 때 참 꼼꼼하게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을 뜻을 빨리 파악하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이 최선인 것입니다.

 10:7,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우박 재앙 때까지만 해도 바로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완강하였던 바로의 신하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줄 것을 바로에게 간청한 것은 그들 역시 자신들에게 임하는 재앙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10:10,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를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이 말은 조소 섞인 비아냥으로 다시 말해, 자기가 어린아이를 보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본절에서 바로가 생각하는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에게서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10:11,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9절에 대한 바로의 답변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모세의 출애굽 요구가 더욱 구체성을 띠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바로의 분노가 더욱 커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0:17,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바로의 심정이 매우 절박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바로는 메뚜기가 물러나자 또 다시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 바로도 고집이 셉니다. 웬만하면 하나님께 무릎을 끊고 "주여 명령만 내리소서 무엇이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을 텐데,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바로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을 다 채우는 바로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바로 같은 우리들을 우리가 순종만 하면 우리들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신앙의 단계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열심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생기면 그 때에는 우리의 고난의 개념도 바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와 하나님의 관계 형성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지면 어떤 고난도 우리에게서 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서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을 때는 우리는 고난을 맞이하는 태도가 틀릴 것입니다. 그때는 두려움이 앞설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임재함이 희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세상적인 맛에 취해있을 때일 것입니다. 우리의 야망, 우리의 성취감, 세상적인 맛에 젖어들 때는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있는지를 한 번 체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의 임재가 작게 느껴지거나 느껴지지 않을 때는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요즘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아서 너무 힘들어요 제발 나에게 하나님을 나타나게 하여주소서"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