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출애굽기강해]#36. 15:22-27. "마라의 샘물"
성경은 항상 은혜를 받고 나면 그 뒤에는 고난이 뒤따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넌 뒤에 여호와께 경배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런 하나님이면 어디라도 함께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을 직접 체험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희망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이제는 어느 누구도 우리들을 핍박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젠 우리들은 노예가 아니라고 그들은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항상 기쁨 뒤에는 아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살이와도 같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아픔 뒤에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기뻐하지 말고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기쁘면 무게 중심이 높아져서 위험하고 마음이 너무 슬프면 무게 중심이 너무 낮아서 무겁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난이 와도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 5:3-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를 연단을, 여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애굽 동편 국경 지역의 광야를 가리킵니다. 지역적 특성 때문에 마시기에 필요한 물을 얻지 못하였으며, 동물 가죽 등에 담아왔던 물은 고갈되어서, 가축이나 사람들이 서서히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최초로 장막을 친 곳입니다(민 33:8). 광야에서 장막을 쳤다는 것은 그곳에 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물은 마시지 못하는 물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른들도 목이 말라 힘이 들었지만 어린아이들과 가축들이 목이 말라서 울부짖고 난리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15:24-25,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자손이 터뜨린 첫 번째 원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조그마한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쉽게 터뜨리고 마는 간교하고 변덕스러운 인간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법도와 율례'는 아직 성문화 된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명하시는 준수사항, 즉 따라야 할 말씀을 의미합니다. '시험하실새' 이 부분은 어떤 구체적인 사건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를 언제나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지적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여 순종의 여부, 곧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이 시험으로 인한 시련을 통하여 인내와 순종, 자기 부인의 힘을 기르도록 하십니다(약 1:2-4)
15:26,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라니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아픔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열 가지 재앙은 이방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치르는 영적 전쟁에서 항상 이기신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절대자인 동시에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치료해 주시는 친근한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픔이 치유가 되어서 회복되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우리의 인생이 꽃피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책'에 대하여 '칭의'를 받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아픔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아픔까지 해결해야만 우리 내면의 진정한 구원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엘림은 마라 남쪽 10km 떨어진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을 하던 마라에서 얼마 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조금만 참았으면 되었을 텐데, 본문에 나오는 12와 70은 완전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곳은 우연히 이스라엘이 도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섭리하심에 따라 인도된 곳이라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단을 받을 때 참으로 힘이 든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원망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연단을 경험한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저 또한 연단을 많이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터득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죽이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담해졌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난 뒤에 나에게 다가오는 연단을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 연단을 승화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단은 받기 싫습니다. 그래서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향해 간다"(빌 2:12). 연단은 우리가 피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합니다. 이 말은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들은 말인데 연단을 받을 때 힘이 된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은 엘림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항상 대기시켜 놓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단을 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연단으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을 체크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등 따시고 배부를 때는 누구나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올 때 우리의 신앙이 참 신앙인지 아니면 액세서리 신앙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엘림을 준비해 놓았다는 것을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가! 그래서 오늘도 담대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