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출애굽기강해]#45. 19:7-15. "백성들의 언약"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을 맺으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동의를 구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나와 언약을 맺자고 하면 될 것인데, 동의를 구할까? 하나님은 동의를 구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므리바 물 사건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런 능력을 몰랐다면 언약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 언약을 맺으려고 했을까? 언약을 맺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언약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제의와 하나님이 머물 수 있는 성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위한 밑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택한 선민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시기 위한 과정에 필요한 백성일뿐인가? 그러면 모세오경 저자는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알고 모세오경을 만들었을까? 그래서 성경이 신비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에 언약에 대하여 잘 모르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9:7,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을 언약 관계를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장로'는 백성들 중 나이도 많고 인품도 높아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중재자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자신의 판단과 의사를 주장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달하는 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19: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그 당시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큰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모든 것을 해결해 주니까,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언약을 마다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 근동의 계약법의 개념은 쌍무 언약이기 때문에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행동으로 충족시켜 드려야 할 의무가 있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 계약 파기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계약을 파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이끌어 나가시는 것을 구약에서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9: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구름이 너무나도 짙게 드리워졌다는 것은 이 구름이 얼마나 지면에 가깝게 내려왔는가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구름 속에서 모세와 일종의 신적 의지를 포함한 명령과 규례 등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 만난 것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신비적 체험을 한 출애굽 당대의 사람들을 다 죽을 때까지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하게 하였을까?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신의 임재 모습을 나타내신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게 하고 귀로 생생히 듣게 함으로써 분명한 증거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심을 확실히 믿게 하여 함이었습니다.
19:10-11,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성결케 하며'는 영적인 성결을 위해서 육적인 성결까지 요구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언약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오래된 애굽 생활과 종교적으로 애굽의 종교 의식 속에 포함된 정결 규례에 익숙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옷을 빨고'란 말은 고대 근동에서는 왕 앞에 나아가는 경우 우선적으로 준수해야 할 사항 중 하나가 바로 깨끗한 의복을 입고 나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불결한 의복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겠다는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삼일을 기다리게 한 것은 정결의 과정의 완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틀 동안 준비하게 하신 것은 그들과 공식적으로 언약을 맺기에 앞서 다시 한번 그 일이 갖는 의미와 중대성을 깨우쳐 주며, 또한 그들이 스스로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틀 동안 잘 생각하고 계약을 하자는 것입니다.
19:12-13,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거룩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거룩한 처소를 침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범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그 경우 그들은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모세가 그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모세는 죄가 없었을까? 죄 없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인 것입니다.
19:14-15,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을 성결하게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준비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하니라" 본절은 일종의 고대 근동의 '정결 의식'을 나타낸 것으로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서기 전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백성으로서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거룩한 의식을 앞두고 몸을 절제하던 이와 비슷한 관습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본문은 강림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오직 집중함으로 거룩함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민 8:19). 이 시내 산에서의 만남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과거 노예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한 사건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이 주어지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오랜 전부터 사역을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을 시키시고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수많은 전쟁을 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나라를 만들게 하시고 또한 그 나라를 세상 권세들에게 망하게 하시고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이 시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건의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찬송과 기도로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무엇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