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강해

[읽기 쉬운 출애굽기강해]#46. 19:16-25. "하나님의 강림"

이헌교 2022. 3. 24. 13:15

 

우리들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자고 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신들을 물리치시는 능력, 홍해를 가르시는 능력, 광야에서 마실 물과 음식을 제공하여 주시고 자기들을 괴롭히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니 언약을 맺어도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언약을 맺으려고 하니까,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고 기독교가 공인되고 난 뒤에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 최초의 이단은 '마르치온 주의'입니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너무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약의 하나님만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아이러리 하게도 성경 정경화 작업은 이들로 인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아타나시우스가 주체로 성경 정경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확정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언약에 앞서 성결에의 요구를 명하셨던 하나님께서 백성이 성결의 결례를 마치자 드디어 천지의 무쌍한 변화를 동반한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연출된 하나님의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의 임재는 계시될 율법의 중요성과 절대적 권위를 암시합니다. 더불어 모세의 중재자 역할이 부각된 것은 그가 선포할 메시지가 권위 있게 전달되어 백성들이 전적으로 그것을 수용할 수 있게 하려는 하나님의 치밀하신 조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16, "셋째 날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우리와 번개는 하나님의 존재의 영광과 그 위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성경은 표현합니다. 큰 뇌성(시 77:18), 번쩍이는 빛(마 4:16)은 성경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계시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나팔 소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예배 속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표시입니다(삼하 6:15).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호언장담으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과 위엄을 목격하자 겁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 타락 이후 본능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성경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9: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본문은 이방 종교와 여호와 종교와의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즉 이방 종교에서는 먼저 인간이 신을 애타게 찾음으로써 신과 인간 간의 관계가 성립되는 반면, 여호와의 종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먼저 인간을 부르시고 찾아 주심으로써 양자간의 교제가 성립됩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은 대표하여 모세를 중재자로 부르심으로써 그들과의 교제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19: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구약시대에는 거룩한 장소나 물건을 하나님께서 정한 규례 외에 범접할 경우에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래 10:1,2 민 4:20). 일종의 '신성 모독죄'로 간주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임의적인 목적과 욕구로 그 모습을 보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근본적인 구분을 거부하는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19:22,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청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여기서 말하는 제사장은 율법 제도에 의해 임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기존에 맡았던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백성들의 정결은 자신들의 죽음을 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제사장들의 정결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온전히 운용되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매개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내적 정결이 중요한 일입니다.

 19:24,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산에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모세의 특별한 위치를 강조하기 위함에 있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아론도 첨가되고 있으며 경계를 넘어 접근하는 것이 금지된 백성들과 함께 제사장들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모세와 아론의 중보자적인 역할을 더욱 특별한 것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모세에게 아주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세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말도 잘들을 것이며 사역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될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카리스마'의 어원은 '카리스'입니다. '카리스'의 뜻은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무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잘나서 하나님에게 리더십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무상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세처럼 어떻게 하나님께 무상으로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이 숙제입니다. 그 숙제를 풀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이 지은 죄를 해결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인한 근본적인 우리 안에 있는 '죄책'을 해결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이 '죄책'이 해결되어야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죄'와는 의미가 틀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죄'는 '죄'에서 파생된 '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죄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고 우리의 새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아담에 속한 부류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부류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부류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찬스를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들을 하나님과 동행을 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하면 '카리스마'는 자동적으로 생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카리스마'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에게는 이런 '카리스마'가 있는가? 를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