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출애굽기강해]#48. 20:4-6.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미국과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가 전쟁에서 지니까 이라크 전역에 있던 후세인 동상이 철거되는 것을 방송으로 통해 전 세계적으로 중계방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북한에서도 김일성 부자의 동상이 커다란 모습으로 세워져 있고 그 동상에서 북한 주민들이 꽃을 받치고 고개 숙여 절을 하는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왜 독재자들은 자기의 동상을 만들어서 국민들로 하여금 섬기게 하고 있을까? 아마도 국민들의 마음을 빼들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복음이 전하는 곳마다 세워져 있었으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더 잘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인데, 왜 하나님은 이것을 금지하게 하셨을까?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차이가 아닐까 쉽습니다. 김일성이나 후세인이 정말로 그 국민들을 사랑했으면 자신들의 동상을 만들라고 했을까? 그들은 국민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을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성경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또한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두 번째 계명을 들어가봅시다.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첫 계명이 여호와 외에 다른 신들과 연관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처럼, 두 번째 계명과 그 뒤에 따라오는 다른 두 개의 계명은 첫 계명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들을 경배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조항 뒤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방법에 대한 세부 규정들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것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떠한 형상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신 걸까? 레위기 19:4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그 어떤 것이라도 그분을 온전히 나타내지 못합니다. 가장 비천한 피조물로부터 가장 고상한 피조물에 이르기까지 모는 종류의 피조물은 여호와를 표현할 수 없으며, 신화적인 피조물로도,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과 물에 있는 모든 것으로도 여호와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과 모든 존재를 지으시고 어떤 식으로든 그 모든 피조물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은 여호와를 있는 그대로 섬겨야지 그들이 상상하는 모앙이나 그들이 선호하는 모습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점령하기 전에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가나안 땅에 범람하는 우상 숭배를 금지시키신 것은 우상이란 인간의 이기심과 잘못된 종교적 심성이 결탁되어 산출해 낸 인위적 산물로서, 인간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어 놓았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형상 앞에서 자기의 소원을 빌었을까? 아마도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 유일하게 형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기복을 위한 대상으로 섬겨서는 안 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아야 합니다.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여기서 우리는 '질투하는 하나님'을 헬라나 로마의 각종 신들이 품었던 시기와 같은 불의한 질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헛된 우상을 향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공의로운 품성으로부터 나오는 뜨거운 열정의 표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삼사 대까지 이르게'란 표현도 하나님의 잔혹성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자식들에게 미치는 부모의 죄의 영향력이 심각하다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의 가정을 생각해보고 폭력이 심한 가정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삼사 대로 제한된 심판과 생생한 대조를 이루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분과의 약속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의 명령을 준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여호와의 무제한적인 축복입니다. 여기서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하브'로서 특히 남녀간의 애정과 육체적인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왜 이런 '아하브'란 사랑의 표현을 썼을까?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이성관의 사랑은 제삼자의 개입을 불허하는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며, 여기서 이 '아하브'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계명의 준수 여부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미움에 근거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순종을, 미움은 거역을 낳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계명 준수의 진정한 목적 역시 '하나님 사랑'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천대까지'을 직역하면 '천명의 사람들에게'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면 많은 후손들이 은혜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삼사 대까지'를 죄를 갚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주는 반면, 천대에 이르기까지 은혜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의 품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공의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보시돼 그 배후에는 언제나 우리들에 대한 짙은 사랑을 깔고 있음을 성경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표현을 잘 합니다. 여기서 '동행'이라는 뜻은 '부부관계'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즉 '성관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아하브'란 남녀 간의 육체적인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만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향한 사랑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훼방을 놓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을 하는가? 아마도 '너 죽고 내 죽자'하는 식으로 싸울 것입니다. 뉴스에 나오는 많은 강력사건은 대부분 남녀 간의 애정 문제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려고 하고 우리들 또한 하나님만을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돈, 권력, 명예, 심지어 자식까지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으면 안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내려놓음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는 그 내려놓음을 자신들의 노력으로 하려고 하니 평생을 속세를 떠나서 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틀립니다. 우리는 그 내려놓음 또한 성령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과의 '아하브'관계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 나의 기도제목은 무엇인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