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5. 2:1-4. "능력이 임하다"

2022. 1. 14. 11:56사도행전강해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은 ‘오순절’을 아마도 ‘오순절파’와 연관하여 떠올릴 수 있습니다. 또한 ‘오순절파’를 주류 교회에서 비켜난, 상당히 시끄럽고 팔도 흔들고 방언을 하는 다소 열광적인 기독교 체험이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이 원래 무엇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1세기 유대인에게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농경 축제였습니다. 농부들이 작물의 첫 단을 가져다, 감사의 표시이자 나머지 작물도 무사히 거두어들이게 해 달라는 기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이나 오순절은 단순한 농경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축제는 유대인의 오랜 기억을 지배하는 위대한 이야기, 즉,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출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신 출애굽 이야기를 일깨우는 축제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 이집트의 장자들이 죽는 날에 구원받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그날 밤 이집트를 떠나서 홍해를 건너 시내 광야로 갔습니다. 유월절이 지나고 50일 후에 그들은 시내산에 이르렀고, 모세는 거기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50일째를 의미하는 오순절은 단순히 추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첫 단, 첫 열매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이 구속하신 자기 백성에게 앞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삶의 방식을 지시하신 날입니다.

 누가는 사람들이 오순절의 첫 열매를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에 대해 강력하게 증언하고 바로 그 첫날부터 회개하는 사람들을 얻는 이 이야기를 독자들은 앞으로 있을 위대한 추수의 상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첫 작물과도 같은 이야기로 이해할 것으로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사건을 자세히 보면 거기서도 어느 정도 대칭 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하자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율법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가셨고, 돌판에 새긴 율법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새길 율법의 역동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다시 오실 것이라고 누가는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누가는 그들이 한 곳에 함께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사건은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이 합쳐진 ‘새 창조’로 변화된 ‘땅’의 첫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영역에 계십니다. 이 땅에 부어진 성령은, 하늘 그 자체의 순전한 에너지로서 우리의 영역에 계십니다. 따라서 성령이라는 선물은 예수님의 승천의 직접적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만유의 주이시므로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은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과 에너지를 성령을 통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령은 우리를 흩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충만하면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앞에서 우리가 승천에 대해 이야기한 관점에서 볼 때 이 바람이 “하늘에서” 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요점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일부가 하늘에서 땅으로 와서 이곳에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사람들에게 ‘영성’을 주어 이 땅의 것들과 무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땅을 하늘의 능력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몸과 생각과 마음과 삶으로 구성되어 있는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람과 불은 길들일 수 없는 야생의 힘입니다. 바람이 큰 소리를 내며 세차게 집을 훑고 지나가고, 불이 각 사람 위에 머무는 체험은 무서우면서도 짜릿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지금 분명 새로운 어떤 것, 위대한 운동을 개시한 어떤 것을, 세찬 바람이 함대를 출발시켜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 모습을, 혹은 작은 불꽃이 큰 산불로 번져 나가는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놀라고 어리둥절해하는 대부분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이 작은 그룹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세상이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누가는 ‘방언’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강조합니다. 방언은 지난 세기에 교회 일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여러 세대와 교회사의 여러 시기에는 사실상 알려지지 않았던 현상입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에도 있는 것으로 보이고 바울도 그 점을 인식했습니다(고전 12:2-3).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초기에 있었던 특이한 일이며 다행이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하려 합니다. 그러나 대개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은 깊이 묻혀 있는 감정을 건드리고 그것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찬양, 경축, 비탄 혹은 슬픔이며, 기도로 표현되는 긴급한 소망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방언’의 중요성을 보고도, 그것이 여려 면에서 유용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고도 오늘날 교회가 방언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너무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해야만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첫 오순절에 겪었던 것과 놀라운 체험을 하지 못해 자기가 진정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를 의심하는가 하면 그런 일을 경험한 것 같은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느끼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 장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신비롭게 움직이시며 각 사람을 다르게 다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놀라운 체험을 허락하시는데 이것은 삶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직접적으로 알아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을 겪어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얼마나 고집이 셌으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사인을 주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필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체험을 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은혜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우리는 그저 요청하면 된다는 것입니다(눅 11:13). 우리는 성령이 언제 오시고 무엇을 하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바람과 불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주실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의 형태나 방향은 그 사람만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리라는 것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구할 것은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의 기도는 나를 위하여 나의 생사화복을 기도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여 성령 충만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