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야고보서강해]#4. 2:1-13. "최고의 법"

2024. 7. 22. 16:12야고보서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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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에서는 성도가 시험 중에 취해야 할 믿음의 자세와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는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에 대해 언급하였다면, 2장에서는 성도들에게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믿음의 행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차별 대우하는 태도를 정죄한 후 영적인 성숙함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야고보가 앞 장 말미에서 세상의 더러운 얼룩이 묻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말한 의미와 연결이 됩니다. 세상은 늘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마음대로 추정하고, 서열을 매깁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바라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교회가 너그럽고 평등한 사랑의 행동을 보여주기 바라실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지역에서는 교회에 속한 회중이 교회에 오면 안내자가 맞이하지만 낯선 사람 특히 가난한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교회지도자가 일어나 문 앞으로 가서 새로 온 사람을 맞는 규율이 있었다고 합니다.

 2:1-4,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본문에서 야고보는 유대의 회당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부자들에게는 좋은 자리가 제공되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간신히 서 있을 정도의 자리나 또한 설교자와 멀리 떨어진 자리나 발판 곁에 있는 자리, 즉 발등상은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패한 자를 발아래 무름을 끓게 하는 것으로 몹시 경멸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취하지 않으시므로(10:34)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딤전 5:21)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그저 동등하게 대우하라고 주장하기보다 한결음 더 나아갑니다. 부자는 교회의 압제자나 박해자까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2:5-7,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겉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본문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말합니다(5:3). 이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물질의 상관없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즉 기득권들보다는 핍박받는 쪽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에서든 부자들은 정의체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할 수도 있고, 혹 판사들에게 뇌물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자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가난한 이들은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당시의 사회에서 부자들은 더 사악했을지도 모릅니다. 7절이 시사하듯이 1세기에는 부자들이 새로운 메시아 운동의 위험성과, 처형당한 미치광이에 대해 크게 떠들어대며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예수를 따르는 오합지졸들의 위험성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2:8-10,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고대 율법에서 가장 핵심적인 구절 가운데 하나를 다시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22:39),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이었고, 초기 기독교에서도 여전히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구절은 좀 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최고의 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의 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아마 왕이신 예수님이 직접 지지하고 강조하신 것이라는 의미로 이 표현을 썼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초대 교회가 실제로 예수님을 으로, 메시아로 보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몇 구절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의 나라를 세우셨다고 믿었고, 세상이 신경을 쓰든 말든, 또한 유대 백성들이 신경을 쓰든 말든 그 다스림 아래서 살기를 결단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 율법을 깨는 것은 실로 범법자가 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 운동의 초기에도 이미 일부 사람들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사회의 조류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의 긍휼(자비)이라고 말합니다.

 2:12-13,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히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야고보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괜찮아 하나님이 다 용서하실 거야,, 그러면 내가 한 일은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순간, 특히 내가 한 일에 가난한 이들을 차별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긍휼을 삶의 궁극적 원칙으로 여기지 않는 세상을 영원히 참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긍휼무슨 일이든 상관없다는 태도나 아량이 아닙니다. ‘무슨 일에는 온갖 오만, 부패, 모독, 범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긍휼을 가져셨다면 가난한 이들이나 무력한 이들은 아주 처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