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요한복음강해]#86. 21:9-14. "바닷가에서 아침 식사"

2023. 6. 13. 16:23요한복음강해

 

13장에서 베드로는, 적어도 자기만은 예수님께 충성하겠노라고 호언장담하며 큰소리쳤습니다. 그분이 어디를 가시든, 감옥이든, 죽음이든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을 태세였습니다(13:36-37). 그러나 18장에서 우리는 실패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불을 쬐는 도중 베드로는 자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합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숯불 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숯불의 냄새를 맡으면 그날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책망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 번이나 부인한 스승이 그다음 날 십자가에 처형이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 내면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은 지금 내려놓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는 제자들의 대표로서 사명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21:9-10,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예수님은 벌써 숯불에 물고기와 빵을 굽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잡은 많은 물고기는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우리의 일과 예수님의 일의 관계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자신이 다 이루었다고 자만심에 젖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뒷짐을 지시고 우리가 열심히 일하기를 기다리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준비하지 않으면, 일은 진행되지 않고,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들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은혜에 감사하며 사역을 시작하지만 점점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공동체가 성장함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자신이 그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든 성도 개인이든 그분의 영광을 가로챌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이 잡은 고기를 반기십니다. 그 가운데 일부를 가져오라고 청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에게 필요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우리들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의 능력을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 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본문에서 ‘물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묘하게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글자를 모은 것과 일치하는데 이런 이유로 해서 초대교회에서는 물고기를 기독교를 상징하는 부호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153마리의 물고기 숫자가 상징하는 의미에 대해 많은 견해가 있으나 가장 유력한 해석은 그 숫자가 복잡한 연산을 거치면 사도들이 세상에 복음을 가져가서 이룰 ‘어획량’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너희들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순종하여 이루어낸 결과물이라고 요한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제자들은 2~3년간 밤낮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제자들이 누구냐고 물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문장은 예수님이 동일한 분인 동시에 어딘지 달았어야만 뜻이 통하는 내용입니다. 어떤 자료도 그분이 무엇을 입고 계셨는지, 그리고 그분의 얼굴을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거쳐서, 어느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신비한 새 세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더 이상 부패와 죽음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았습니다. 그게 어떤 모습일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1:13-14,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습니다(20:15-17). 이것은 아마도 그녀가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특히나 베드로는 더욱더 그랬을 것입니다. 떠 올리기도 싫은 숯불의 기억, 그 숯불의 기억이 치유가 되어야지만 다음절에서 예수님이 명하실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제자들은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에 놀랐을 것입니다. 배 오른쪽에 그물을 내려라. 그 순종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역자의 자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 시간 나는 과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