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3. 16:08ㆍ요한일서,이서, 삼서,유다서강해
본서 전체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교리적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목격했던 요한이 명백하고 간결하게 복음의 핵심이 되는 예수님의 참된 본성을 알려주려고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옛 유대인들은 세계 역사가 두 시기. 혹은 두 ‘시대’로 나누어져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불행과 고난, 불의와 억압이 가득한 ‘현 시대’가 있고, 또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특히 악에게서 고난 받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인 ‘오는 시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라는 단어는 종종 ‘영원한’ 혹은 ‘영원’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 독자들은, 요한도 또 하나님의 새 시대를 언급하는 다른 초기 그리스도인 저술가들도 ‘순전히 영적’ 의미의 ‘영원한’ 어떤 것, 공간과 시간과 물질 세상과는 아무 관련 없는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영생’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보통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라고 합니다. 즉 ‘영생’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는 시대’란 것입니다. 바울처럼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처럼, 요한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시대인 오는 시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래이며 실제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신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권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하나님은 이 미래를 미리 살짝 보여 주셨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오는 시대’가 적합한 때에 드러나기를 기다리시며, 그 시대를 비밀로 간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운동의 핵심에 있는 비밀은, 오는 시대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아무 대비를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가 현재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미래에 해당하는 단어가 “생명”(Life)입니다. 그것은 원래 의도되었던 그 생명, 온전하고 생기가 넘치는 생명, 죽음이 부패시키고 좌절시키고 죽이려 했던 생명,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이제 그것을 얻으려는 누구에게든 제공되는 생명인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생명으로 왔고, 인간의 형체를 취하였고, 하나님의 미래에서 현재로 왔고, 하나님의 오는 시대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던 핵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생명이 사람이 되셔서 미래에서 현재로 나아오셨다는 개념은 너무도 엄청나고 놀라워서, 경탄과 숨죽인 경외와 공경의 어조야말로 합당한 반응일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초부터 계셨던 이 생명을 들었고, 보았고 만졌다면서 우리는 그분을 알았고 우리는 그분의 친구들이었고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친구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가 현재로 들어오자, 현재가 영원히 변화된 것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말미에서 말하듯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 기록하려면 세상은 그 기록한 책들로 넘쳐날 것이라고 했을 만큼(요 21:25), 우리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이 하신 말씀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지금 복음의 진실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1:3-4, “너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본문은 요한이 이 서신을 쓰는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을 보고 그 아름다움과 약속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가족, 즉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하나님의 생명을 사귐으로 나누고 계신 생명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인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그분께 합당한 왕의 칭호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더 깊게는 이전에는 예상하거나 상상하지도 못했지만 이제 그분만이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보고 듣고 만지기까지 한 기이한 일들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보여 주었듯이, 그분은 분명 하나님의 오는 시대의 생명, 사람으로 오신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하나님의 생명, 즉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시면서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생명의 선물이셨던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을 표현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명쾌한 방법으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단어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공동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은 내적 본질을 깊이 나누시며 생명을 공유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적 본질을 깊이 공유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 ‘사귐’이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신 동안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오는 시대의 생명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동안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신뢰하게 된 모든 이에게로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사귐’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시기에 그분을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한 다른 이들에게도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 ‘공유’는 누구든 예수님에 대한 선포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확대될 수 있고, 확대되었고, 확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보았고 들었고 만졌던 이들과의 ‘사귐’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분이야말로, 이 완전하고 진정한 ‘사귐’의 기반이자 본이 되신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의 친구들이 그분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이 ‘사귐’에 함께하기를 뜻하고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많은 이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나의 사명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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