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9. 17:03ㆍ히브리서강해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완전히 떠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고대 유대교에는 무지한 가운데 저질러진 죄에 대해 아주 명확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죄는 속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발적인‘ 죄, 곧 어떤 일이 잘못임을 알지만 그렇게 하려는 의도 없이 순전히 사고로 저지른 일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원리가 바울이 대제사장을 꾸짖은 사도행전 23:1-5에서 재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대 유대교의 법전과 희생 제사에서 죄를 해결하는 중심 제사인 속죄제가 무지한 가운데 혹은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죄를 덮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레 4장).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고의로 죄를 범했다면, 어떤 일이 잘못임을 알면서도 그 일을 했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규정된 제사는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백성들에게서 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율법이 상정하고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방황하던 유목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는, 이스라엘을 규정함과 동시에 보호했던 율법을 고의로 어긴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전혀 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면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니라“본문에서 말하는 ”진리“는 학문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원에 관한 진리 즉,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의 계시를 가리키며(요 1:14),”지식“은 불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완전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롬 10: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전하신 구원의 계시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제사의 효력을 거부하고 계속 죄를 짓는 자들(민 15:30)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릴 수 있는 제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저자는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건짐을 받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는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6:4-6). 즉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성령 훼방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죄가 사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엣날 제사로 돌아가는 것은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린 제사를 통해 모든 죄를 완전히 깨끗게 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부인하고 율법 아래 있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제사로 돌아가는 것은 실체를 거부하고 그림자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곧 구원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맹령한 불“은 문자적으로 ”불의 질투“를 의미합니다. 배교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오히려 격정적인 질투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사 26:11). 이 불은 하나님의 격심한 분노(신 4:24)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옛 제사로 돌아가지 말라고 저자는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10:28-29,”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은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구약 시대에는 두 세 증인만 있으면 동정의 여지없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신 17:2-7). 그런데 이런 구약의 율법은 완전하지 않아서 나붓의 포도원 사건과 같은 것이 일어나기도 한 것이었습니다(열상 21:1-16). 그러나 완전한 구원의 복음을 들었던 어떤 사람이 복음을 굳게 붙들고 복음에 따라 살다가 그 뒤에 등을 돌려 복음은 쓰레기와 같다며 자기는 그것과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짓밟고 언약의 피를 무의미한 것처럼 다루고, 그리고 구원의 은혜가 오는 통로인 하나님의 성령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가 정확히 어떤 사람들을 겨냥하는 것이냐는 질문은 2세기와 3세기 이후 초기 교회가 깊이 고심했던 것이고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내용이 세례 이후 어느 시점에 무언가 심각한 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언급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특히 3세기와 4세기에 상당수 유명한 교회 출석자들이 마지막 가능한 순간까지 세례를 미루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도 죽기 전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사역자들도 임명 전까지 세례를 미루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들은 세례 이후의 죄로 인해 구원 자체를 박탈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견해는 박해가 일어났을 때 벌어진 일에 비추어 더 많은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물리적 폭력이나 죽음의 위혐 아래서 손쉽게 예수님을 모독하고 비방했던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0:30-31,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본문은 신명기 32:35-36을 인용한 구절이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 하면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례에 대한 경고로 대했던 이전 시대의 사람들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잘못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창조주께서 세상에 공정하고 지혜로운 통치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가져오실 때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유대교와 기독교 둘 다의 절대적인 토대입니다. 초기의 전승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듯이, 계획적으로 그분의 통치에 맞서 창조 세계 자체와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서 나타나는 기준을 비웃는 삶을 살고, 개혁이나 갱신의 모든 시도를 일축하는 사람들은 그날에 파멸의 징벌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보다 구체적인 위험에 대한 경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곧 기독교 신앙에 접근해 아마도 기독교 예배 생활에 동참했을 어떤 사람이 나중에 돌변해 공개적으로 완전히 부인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6:1-8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비기독교적인 유대교 측에서 와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인 동료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아주 구체적인 박해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절박하게 다가오는 말씀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믿으면 복을 받고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별로 은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히브리서가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는지 보다 깊이 생각하고 그대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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