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출애굽기강해]#21. 9:1-7. "다섯 번째 재앙"

2022. 1. 7. 16:31출애굽기강해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과 절기에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6일 동안은 세상 신인 바알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일날만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는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맘몬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 함께 세상 신도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열 가지 재앙 중에 다섯 번째 재앙인 가축에 대한 전염병의 재앙입니다. 이 당시 애굽인들은 가축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특히 이 당시 애굽왕인 바로는 소를 숭배했다고 합니다. 구약에서의 복의 개념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즉, 자식, 가축 등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25장에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고 난 후 후처 그두라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복의 개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개념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고 후처 그두라에게서 여섯 명의 아이를 낳은 것은 아브라함이 노망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당시 구약시대의 복의 개념에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복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축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게 하였을까?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후처로 삼아 자식을 6명 나은 것처럼 그 당시 구약 시대의 복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처음부터 여호와를 섬기는데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최고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존재의 이유인 것입니다.

 9:2-3,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게 더하라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며" '말'은 주로 전쟁용으로, '나귀'는 단거리 수송용으로 또는 경작에, '낙타'는 장거리 수송용에 각각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가축들의 피해는 애굽의 군사, 경제, 교통에 치명타를 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애굽의 각종 우상 신들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축들은 각종 형태로 형상화되어 애굽인들의 경배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 우상 종교의 희생 제물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재앙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생사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9:4,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살았지만 얼마간의 개인 재산은 소유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힘이 들면 애굽의 생활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러한 재산을 구분, 보존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백성에게 얼마나 구체적인가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9:5-6,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기한을 정한 것은 이 당시 애굽에서 가축의 전염병이 가끔 일어났기 때문에 이번 경우에는 하나님의 심판임을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모세의 메시지를 믿는 자들에겐 그들의 가축을 재앙에서 구해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들에겐 이처럼 하나님의 궁휼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바로가 사람을 보낸 것은 재앙의 결과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바로가 마음이 완강하여지지 않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나머지 다섯 가지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거역하고 자기의 고집대로 살아가다가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인간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많은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고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은 무엇인가? 절대 타자와의 관계 형성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을 하지 않고 하는 모든 종교행위는 우리의 '의'를 위하여 하는 행위입니다. 구제, 선교, 십일조, 목회 등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나의 야망과 나의 꿈을 위해서 아니면 죽어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를 깊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씨앗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와야 합니다. 나의 성품으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지만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삶이 예배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하며 항상 영적 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아마도 바울 시대보다도 더 영적 전쟁을 치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너무나도 악한 것이 우리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나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