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출애굽기강해}#61. 22:1-4. "계명의 정신"

2022. 5. 11. 12:13출애굽기강해

 

22세기 신학자 오리겐은 성경 해석법을 영, 혼, 육으로 나누었습니다. 육적인 해석은 문자적인 해석이고, 혼적인 해석은 윤리적인 해석 즉, 큐티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해석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가 왜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는 여러 이유 중 가장 첫 번째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오늘 말씀을 그냥 읽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그렇게 성경을 읽어왔으니까? 그렇게 성경을 읽고 자기만족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일 년에 몇 독을 한다고.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자칫 우리들을 율법의 틀에 가둘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약간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찾아보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찾아봅시다.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 지니라"본문은 도적질 한 자가 잡혔을 때 그의 손에 도적질 한 소나 양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도적질 한 경우는 '갑절'로 갚아야 하지만 왜"4배나 5배를 갚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본절을 해석을 하려면 4절을 알아야 합니다.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통상 처음 도적질을 하면 도적질 한 물건을 겁이 나서 팔거나 죽이지 못하고 그냥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섬세한 부분까지 체크를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둑질한 소나 양을 처분했다는 것은 상습범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소의 경우는 다섯 배로, 양의 경우에는 네 배로 갚을 것을 명한 것은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처음부터 소를 도둑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도둑질하다가 나중에 간이 배밖에 나오면 소까지 훔친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대 근동에서는 소를 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졌고, 소를 사육하는 데 있어서 양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가고 경제적으로 더 귀중한 가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더 많은 배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22:2-3,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밤에 도둑질하다가 걸려서 맞아 죽는 경우는 아무 책임도 물을 수 없지만 낮에는 도둑을 죽이면 죄가 인정된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을 할까? 이 법은 이방인들의 법과 구별이 됩니다. 하나님의 법은 아무리 도적이지만 인명의 존귀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에 도둑질하는 것에는 엄하게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도둑질에 있어서 고의성이 있나, 아니면 충동적이고 계회적이지 않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낮에는 좀도둑이지만 밤에 도둑질하는 것은 그만큼 고의성과 악의를 가지고 도둑질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밤에 도둑을 죽이는 경우는 고의성이 없고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우연적으로 일어난 살인행위이고, 낮에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상황 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둑을 죽이는 것은 고의성이 있다고 판단이 되어 그 죄를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둑이나 그 도둑을 잡으면서 살인을 하는 자나 둘 다 고의성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고의성은 그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도둑질을 하는 자의 마음에는 '탐심'에서 나오고, 도둑을 죽인 자의 마음에는 '분노'에서 출발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의 상태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가 왜 도둑질을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처럼 일을 하지 않고 쉽게 살려고 도둑질을 하는가? 아니면 정말 먹을 것이 없어서 도둑질을 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도둑질은 죄라고 하시면서 배상을 할 능력이 없으면 노예가 되어서라도 배상을 하라고 하십니다.

 로마서에 보면 인간은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인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이란 세상 권세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상 권세란 무엇일까?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싫어하는 권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원래 아담 안에 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인정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해서 성인군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과 인격은 세상 권세와 죄의 권세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죄의 몸'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본능'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주었지만 이스라엘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의 힘으로 지키려고 하면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처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경멸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들을 경멸했을까를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 그들은 일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의 정결의식을 일상생활에 적용한 자들로서 거룩하고 도덕적으로 살려도 노력한 자들인데, 왜 예수님은 싫어했을까? 그러면 그들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과연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만족과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의성과 탐심'이라는 우리 내면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에서 끊임없는 영적전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본능과 하나님의 영과의 싸움입니다. 구약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의'로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치르는 영적 전쟁도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은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능을 자제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겠다고 하는데 이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시간에 나는 영적전쟁을 나의 힘으로 치르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 하나님께 의지해서 치르고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