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3. 1:18-25. "하나님의 어리석음"

2021. 10. 27. 18:06고린도전서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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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은혜"란 무엇일까요? 은혜는 공기나 물질 같은 '실체'가 아니어서 앞뒤로 움직이지도 않고 수도관으로 흘러 보낼 수도 없습니다. 창조 안에서 구속 행위 안에서, 그분의 세계에서 악과 죄와 사망을 제거하신 일에서, 그리고 죽음 가운데서 생명을 불러일으키신 일에서 자신을 내주고 자신의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가 "은혜"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그분의 충만한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그 은혜를 실행에 옮길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왕에 관한 선포는 단순히 왕권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선포 자체가 왕권이 효력을 발휘하게 하는 수단이어서, 이 선포는 왕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단호하고 권위 있게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선교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 즉 자신의 선교의 핵심인 왕이신 예수의 주권을 실제로 선포할 때 이 사실을 확실하게 경험했습니다. 이 선포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고 전통적인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며, 그들을 사로잡던 이교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고, 인류가 마땅히 그러길 의도하셨던 참 사람의 모습이 되는, 이제껏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을 가능케 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실제로 그 힘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충성심, 다른 지조들을 말하는 상징과 습관을 계속 유지하거나 버리지 못하는 것은 다른 권세들에게 속마음을 두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것은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는'것이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자 바울은 그 자신이 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에 사로잡혀 그 사람으로 숨 쉬며 구원받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이 복음이 진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임을 계속 반복해서 체험하고 발견했습니다.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이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바울은 지적, 문화적 분위기에 자부심을 지닌 이교도 도시 고린도에 들어와,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렸지만 하나님에 의해 죽은 사람들로부터 부활하신 분, 이제 세상의 주님으로서 사람들에게 신실한 순종을 촉구하시는 나사렛 예수를 용기있게 전할 때,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없는 정신 나간 메시지였고, 참신한 철학이 아니라 미친 생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소식은 고급문화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멸시받는 민족 출신으로 처형당한 범죄자에 관한 소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우리들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로는 이 십자가의 능력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1:20-21,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메시아와 그분의 십자가에 관한 메시지가 인간의 언변이 지닌 힘과는 전혀 다른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변은 과시적문체로 귀를 즐겁게 해 주어 한낱 인간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회당이나 시장이나 토론장에 섰을 때, 바울은 영리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바울이 말하는 스타일이 재미있어서 자신들이 복음을 믿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 화려한 말솜씨로 먹고사는 '소피스트'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가 직접 역사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저 복음을 전하기만 해도 인간의 말이 지닌 어떤 능력과도 사뭇 다른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그 앞에서 인간의 모든 능력은 약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그 옆에서 인간의 모든 학식은 어리석어 보인다고 본문은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들은 이 메시지를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은 어느누구도 로마인의 손에 처형당할 메시아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는 이교도의 손에 죽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쳐부숴야 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은 도무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1:24-25,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바울은 반대로 말함으로써, 놀라운 수사적 효과를 거두며 정곡을 찌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다! 기독교의 복음은 제국의 오해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하나님입니다. 복음은 철학자로 가득한 방을 향해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하나님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가식과 권력과 명망에 맞서시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그것을 전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약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강한 사람과 똑똑한 사람과 똑같이 환영을 받는 나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에서 말하듯이, 복음 곧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셨기에,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즉위 선언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선언될 때, 놀랍게도 사람들은 만사가 변하는 것을 발견되며, 삶이 변하고, 사람의 마음이 변하며, 상황이 변하고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하는 데 그 공동체는 이 메시지에 사로잡혀 온갖 일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이 진리임을 믿고, 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고, 예수님께 더없는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염두에 둔 증거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는 것은 성령하나님의 역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들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들의 의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갖다 놓는 모든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바로 '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형성이 되지 않고 하는 모든 종교행위는 자신의 '의'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체크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나의 본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깨어있으면 얼마나 피곤할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해본 사람들은 그 기쁨을 알기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면 굉장한 불안감과 공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미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 즉, 거듭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가 존재하는 한 기독교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목상해봅시다. 나는 과연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하여 거듭났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