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15. 11:20ㆍ사도행전강해
스데반은 지금 자신을 변론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종교 범으로 몰려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 율법, 예루살렘 성지,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이방 문화에 속국으로 살면서 최소한 자기들이 지켜야만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이런 것을 부정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전과 율법을 반대하는 말을 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습니다. 즉, 예수가 성전을 무너뜨릴 것이고 문화적, 종교적 상징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모세가 물려준 규례를 고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런 혐의를 부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면으로 맞서서 오히려 부활한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7:2-3,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스데반은 정면으로 반박하는 대신에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변론하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성경을 통해서 연설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이는 자기는 신성모독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서부터 자신의 변론을 시작합니다.
유대 민족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되고, 창세기는 이 세상이 어떻게 바로잡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는 창조주 하나님이 창세기 3-11장에서 시작된 인간의 죄와 사회적 재앙과 우주적 재난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 아래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전과 다르게 살라는 부름, 즉, 조상들의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라는 부름을 받았는데, 그 부름이 그를 구별하였고 그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었다고 스데반은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7:6-7,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 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스데반은 바울이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했듯이, 특히 창세기 15장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고, 또한 그의 후손들이 이방 나라에서 종살이하겠지만 그곳에서 나와서 현재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사는 이 땅을 유업으로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은 ‘성지’에 대해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8~14절까지 스데반은 요셉의 이야기를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셔서 바로의 집안과 이집트 전체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형들이 먹을 것이 필요해서 찾아간 사람은 그들이 질투해서 버렸던 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생 요셉은 형들을 자비롭게 대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다고 스데반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한 것은 구약 이야기의 절정이자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7:15-16,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매장지를 구입한 것과 조상들이 그것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앞으로 나올 출애굽 이야기를 등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것과 더불어 출애굽기는 유대인 정체성의 본질이며 스데반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즉, 자신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설교입니다. 이는 그만큼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그 내용이 새로운 내용은 아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전의 의미를 설명할 때에 히브리서에서 보이는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의 십자가의 제사장적 의미에서 성전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우리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하심은 바로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병 고침과 귀신 물리치는 기적과 표적이 성령의 능력으로 알고 있고 그런 능력이 지금의 교회에서 나타나면 교회가 부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고 목회자들 또한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병 고침이나 축귀 사역을 위해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처럼 성령 사역은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한 사람이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로 바뀐다는 것이 기적이고 표적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성령 사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를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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