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23. 6:8-15. "스데반이 표적이 되다"

2022. 3. 11. 12:06사도행전강해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에 손을 떼었을 때 교회에는 더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제사장의 많은 사람들도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이들은 골수까지 유대교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까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때 당시 교회는 복음의 핵심문제에 직면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사도들 보다는 집사 중 한 사람인 스데반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은 이제 막 ‘집사’로 임명되어, 예수님을 믿는 ‘새 가족’에 의존하는 공동체 식구들에게 날마다 먹을 것을 분배하는 일을 조직하고 돕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는 또한 행정 일뿐만 아니라 가르치고 치유하는 일도 병행하면서 활발하게 사역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갑자기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고 곧 그에게 온갖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6:8-9,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사회에 속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람어를 쓰는 유대 출신 유대인보다 율법이나 성전에 대해 느슨했던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국에 나가면 다들 애국심이 더 좋아지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날마다 성전 문 앞에 가서 사람들을 가르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요 집결지는 성전이었고 따라서 주로 그곳에서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루살렘 지역에 있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회당에 출석했고 그곳에서 예수님에 대한 선포로 인해 그곳에 참석한 디아스포라들과 심한 논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6:10-11,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그 당시 사악한 이방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몇 가지 핵심 사상이 있었고 유대인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것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곧바로 공격을 받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성전’, 과 ‘율법’, 과 예루살렘과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성지’,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네 가지 상징 안에 하나님에 관한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너는 모세의 율법을 침해하고 있다’. ‘너는 성전을 거스르는 말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너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했던 것은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애초에 율법과 성전을 주신 목적에 따라 이제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강경한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스데반을 비난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데반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확신과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계속 제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옳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거나, 아니면 진창을 끌어들이거나. 그런데 그들은 후자를 택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로 데려갑니다(12절).

 6:13-14,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사형을 시키려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애초부터 스데반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결심한 이유는 율법 수여자인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고, 성전을 모독했으며, 율법을 거슬러 말하였고,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허물고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고칠 것이라고 스데반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왜 이렇게 논쟁에 있어서 물러나지 않았을까? 그것은 스데반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능력을 부어주셔서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안다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나의 뒷 배경이 하나님이라고 안다면 얼마나 담대해질 수 있는가를.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의 삶을 간섭하신다는 것을 아는 되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누가는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우리들 또한 스데반처럼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들과 충돌 했던 경험들이 다들 있을 것입니다. 항상 이것이 의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왜 이렇게 사람들이 싫어할까? 왜 사람들은 이 좋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우리는 천사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출 34:29)와 변화산에서 예수님(마 17:9)의 얼굴이 빛났던 것처럼 죽음을 앞둔 스데반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초조함은 찾아볼 수 없었고 마치 천사의 얼굴처럼 위엄 있고 평온하게 보였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지금 순교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순교 또한 성령의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2세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순교가 신앙의 척도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 임박한 종말론을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가 유행을 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인물인 오리겐 또한 순교를 하고자 했는데 아버지의 만류로 순교를 하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남자의 상징을 거세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순교 또한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를 위하여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위하여 순교까지 했습니다”라고,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누가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그리스도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하나님을 우리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있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가만히 우리들의 기도하는 내용을 한 번 묵상해보세요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지금은 복음을 전한다고 스데반처럼 순교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을 싫어한다. 더구나 요즘은 더욱더 그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스데반처럼 우리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면 담대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묵상해봅시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성령에 힘입어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