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50. 15:12-21. "예루살렘회의 결론"

2022. 6. 9. 11:09사도행전강해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의장격인 야고보가 결론을 맺는 부분이다. 우선 우리는 야고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에서는 야고보를 단 한 번밖에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12장에서 베드로가 몸을 숨기기 직전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야고보에게 알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말한 야고보가 요한의 형제 야고보일 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전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열둘 중 한 명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굳이 따로 지목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처럼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는 예수님을 믿거나 따르지 않았습니다(요 7:5).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특별히 따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전 15:7)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이 신생 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중요한 회원이 되었으며, 비록 열두 명 중 하나는 아니었어도 12장에서 베드로가 작은 재난을 당한 후에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이 붙은 신약성경 서신서의 저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매우 경건하고 헌신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고,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부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같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후대의 전설에 의하면 그가 자기 민족을 위해 기도 하느라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지내서 그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딱딱해졌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주후 62년에 열심당원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의 판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우선 베드로가 한 말로 시작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몬이 말하였으니” 야고보가 베드로의 이름을 시몬이라고 부른 것은 이 논쟁이 아람어로 진행되었음을 암시하고자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베드로가 말한 것이 선지자들의 말씀에 일치한다고 1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5:16-18,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야교보가 인용한 본문 말씀, 아모스 9:11-12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 바로 뒤에 나옵니다. 그 심판은 너무도 엄중해서 선택받은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여러 백성 중 하나로 전락한다고(암 9:7)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무너진 다윗의 집’이 회복되면, 민족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올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도 회복될 것이라고(암 9:11-15)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메시아가 되심으로써 다윗의 집이 회복되었다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이 유일한 신분 자격 조건이라는 데 근거하여 이방인들을 그 모습 그대로 환영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15:20-21,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야고보의 결정은 앞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 나갈 교회에 미칠 영향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교회는 상당수 유대인 공동체와 함께 섞여서 살 터 인데, 유대인들은 그 결정이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어떤 각도로 보면 매우 유대교적으로 보이는데 또 다른 각도로 보면 매우 비유대교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한편으로는 할례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필요하게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말라는 이중 원칙을 제시합니다.

할례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유대인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등 시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그들은 분리된 범주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필요하게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세상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는 유대인 거주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이 무엇을 명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율법과 예언서가 성취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 주장은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불쾌하게 작용할 수 있으니 모세가 말하는 가장 명백한 것들은 지키는 것이 유익하다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이 말한 규정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야고보가 염두에 둔 것은 이교의 예배와 관련된 다양한 의식 행위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정론입니다. 피를 마시는 행위나 제의적 성매매나 기타 무절제한 행위들인데, 이것은 모든 이교 신전에서 늘 행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일부 신전에서 간혹 행한다고 알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이교행위를 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그것을 삼가하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큰 요구가 아닐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이 바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집에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입니다. “봐라 괜찮다 예수를 믿는 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상숭배와 부도덕으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에 혼란이나 분쟁을 일으킬 리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의 이 결정 이후에도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율법 적인 부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갈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 율법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에 집착하여 강압적으로 그것을 강요하고 따르라고 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도중에 복음을 포기하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율법의 정신을 공생애 동안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시간 나의 신앙생활은 율법의 행위에 얷매여 있는지 아니면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