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5. 15:54ㆍ사도행전강해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바나바와의 의견 차이로 서로 다투어서 결국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선교여행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누가는 왜 이 과정을 상세하게 다루면서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을까?
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은 새로운 지역으로의 선교 사업이 아니라 1차 선교 여행에서 회심한 신자들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나바와의 갈등은 1차 여행 후 예루살렘 회의 참여하기 전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갈 2:11-21). 만일 이 무렵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함께 여행을 다니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데서 일어났습니다.
15: “37-39,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 39절에서 ”심히 다투어“의 원어는 ‘파록시스모스’입니다. 이 단어를 의학적 맥락에서는 ‘발작’, ‘경련’을 뜻하거나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 단어는 심각하게 고양된 감정, 벌겋게 상기되고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큰 소리를 지르는 바울과 바나바를 상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나 다투는 데는 두 사람 다 어떤 면에서는 옳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한 마가는 도중에서 힘이 들어서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군중들이 그들에게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고자 하는데 그러면 마가는 또다시 예루살렘으로 도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동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반면 평소처럼 ‘격려의 아들’이라는 별명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바나바는 지난번 여행에서는 마가가 어려서 당황했던 것이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골로세서 4:10에 의하면 그들은 사촌 지간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친척 관계였다고 합니다. 바나바는 마가가 조금은 성숙했고 그의 영성도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과 바나바는 회의를 통해 확고하고 공공연하게 확립된 안디옥과 예루살렘의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기 원한다는 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가문제로 이렇게나 다투는 것은 근본적으로 두 사람 간의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의 사건에서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 앞에서 행한 행위, 즉,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베드로와 함께 그곳에서 물러난 사건을 두고 바울은 바나바에 대한 신뢰가 많이 무너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의 입장에서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자신의 피후견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을 때 그가 바울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소에서 무명으로 있던 그를 데려다가 안디옥에서 유명한 설교자이자 선생이 될 기회를 주었습니다, 첫 선교 여행도 바나바가 주도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주요 연사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넘겨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바나바는 자신이 선임자라는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은 서로 물러서지 않고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다투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서로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15:40-41,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현재 교회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누가는 본문에서와 같이 “은혜”를 큰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이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든 일에서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선교 여행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인 키프로스로 가서 그곳의 사역을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시민인 실라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여행은 단순히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다시 방문하는 것을 넘어 지리적, 신학적 미답지로 들어가는 완전히 새로운 모험이 되었습니다. 실라가 로마 시민이었던 것은 나중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한편 실라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 등장하고 고린도후서 1:19에서 언급되는 ‘실루아노’와 동일 인물입니다.
과연 바울이 바나바와 2차 선교 여행을 갔다면 실라와 동행했을 때만큼의 효과를 거두었을까? 시편 76:10,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여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아마도 이 말씀을 바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인간의 분노마저 하나님은 자신에게 영광이 되게 하신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했을까? 아니면 다음에는 혈기를 부리지 말아야지 하면서 자책을 했을까? 물론 이들의 다툼에서 인간의 분노라는 죄에 대한 변명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가 증명하는 사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과 죄에서도 큰 선을 끌어내실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 줄 따름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배워야 하는 겸손의 교훈일 것입니다. 부디 오늘 본문을 교회의 사역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 시키는데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초대 교회에서 구속사적 입장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이후에 성경에서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상황 즉 사도행전 1:8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 또한 2차 선교 여행이 이렇게나 후대에 영향을 줄지 몰랐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복음 사역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겸손’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알았으면 합니다.
이 시간 나는 ‘겸손’을 어떻게 사역에서 적용하고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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