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53. 16:1-10. "디모데, 그리고 새로운 시작"

2022. 6. 17. 21:14사도행전강해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공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욕망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소망은 매 순간 우리들과 동행하고 싶어 할 만큼 가치가 우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공간에서 우리의 가치를 실현하고 발휘해 내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소망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우리들도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소아이사에서는 큰 전도 일을 하지 못했지만 가장 신실한 동역자요 협력자인 디모데를 선택하는 것과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협력자로 삼은 바울이 드로이까지 내려갔고 거기에서 환상을 보는 내용입니다.

 16:1-2,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그 무렵 루스드라에 그리스도인 가정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신앙 훈련을 받았던 사람입니다(딤후 1:5), 아마도 그는 사도 바울이 자기 고향인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을 직접 목격했을 것입니다. 즉, 디모데는 바울의 1차전도 여행을 통해서 복음에 대해서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약 15년 후에도 바울이 디모데를 연소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처음 만났을 때 디모데는 십 대(18세쯤)였을 것입니다.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은 새로운 마을에 도착하면 언제나 유대교 회당부터 가는 방식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그러려면 그와 그의 동료들이 제대로 자격을 갖춘 유대인으로 받아들여져야 했습니다. 디모데는 분명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되는 일차적인 자격이 바로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 그에게 할례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해 준 것입니다. 이것은 디모데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할례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유대인으로 인정받아야 선교가 훨씬 더 쉽게 진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갈라디아서 2:1-5에 나오는 디도와 관련해 일어난 일과는 정반대입니다. 디도는 이방인이었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일부 강경파들은 그를 온전한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할례를 받게 하고자 했지만 바울은 거절했습니다. 참 하나님의 나라는 복잡한 것 같습니다. 이들 일행이 여러 성을 다니면서 예루살렘 회의에서 정한 규례를 가르치면서 각 교회의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믿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났다고 4-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6:6-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이들은 서쪽으로 계속 가서 라오디게아와 다른 여러 마을을 거쳐서 에베소 해변으로 올라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로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아시아’, 즉, 오늘날 터키의 서쪽 끝 전체를 차지하는 로마 관할 지역에서는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북쪽으로 가서 갈라디아를 지난 후에 서쪽으로 꺾어 브르기아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거리는 약 320킬로미터가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이 당시 이 거리를 도보로 이동한다면 2-3주는 걸렸을 것입니다. 이 거리를 가면서 각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바울과 실라는 동반자 관계를 다졌을 것이고, 그중 가장 늦게 합류한 디모데는 그들을 알아 가면서 한편으로는 도대체 내가 무슨 일에 가담한 것일까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는 결론을 내렸는데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라고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드로아에 있는 해변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로아는 아시아 지역인데, 아시아 지역에서는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 무렵 이들은 터기 안에서 사역을 더 진전시키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 중 두 사람, 바울과 디모데가 그곳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한밤중에 환상이 보인 것입니다. 16:9-10,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마게도냐는 그리스 북쪽에 있습니다. 바다 건너 완전히 새로운 지역이었습니다. 몇 주간 걷고 기다리고 궁금해하고 기도했던 결과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터키에서 전도를 더 할 것이 아니라 국경을 건너 그리스로 가야 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신기원을 여는 일이었습니다. 1:8에서 말하듯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가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인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 후 새로운 동료가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10절에서 “우리가”란 표현이 나옵니다. 드디어 누가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누가를 만났고 누가는 다음 이야기에서부터 그들과 동행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일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두셨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면 바울일행은 누가를 드로아에서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사도행전은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항상 깨어있어야 하며 우리들의 안테나를 하나님에게 향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나의 시선은 어디에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