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22. 11:44ㆍ갈라디아서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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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복음진리를 교리적으로 논증해 왔지만(3:1-4:31), 이제부터는 이 진리를 어떻게 실제 생활에 적용할 것인가라는 실천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에도 교리적인 부분, 즉 율법주의의 한계, 믿음으로 얻어지는 영적 자유 등이 있으므로 교리에서 실천으로 전환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5장에서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자유를 지킬 것과 그리스도인의 실천 강령과 행동원리를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본문은 속박과 자유를 주제로 한 4장을 요약하면서 5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저주와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고 그 자유 가운데서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바울은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종의 멍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멍에는 두 마리의 소를 연결하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짐승들의 목에 올려놓았던 나무틀로서 종으로 살아가는 힘든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마 11:29-30).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약 천년이 넘게 하나님과 그들이 나눈 교제는 율법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율법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이정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으면 율법, 즉 이정표는 그 역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되돌아가고자 하고 있는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바울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2-4,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엄숙한 어조로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원의 조건으로서 할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죄인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부인하고 그의 절대적인 구속의 능력을 무익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할례까지 받아야 한다고 교묘하게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할례를 받는 사람은 율법 전체에 복종하는 것이 되며 할례뿐만 아니라 율법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고 바울은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필요나 선택에 의해 부분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일점일획이라도 빠짐없이 지켜야만 합니다(신 27:26). 그런데 그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몸소 체험을 했던 것이 구약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리새파 출신인 바울은 할례는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유일한 목적은, 다른 모든 생활 방식에서 유대교 회당의 모든 규율에 순종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입장에서 선택은 불가피할 것입니다. 둘 다를 취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메시아와 동행하려고 한다면 율법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을 고수한다면, 당신은 메시아의 백성에 속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5-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본문은 바울이 기독교의 실체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5절의 강조점은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참으로 자기 백성이라고 공개적이고 완전하게 선포하실 그때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실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의롭다는 선고가 명백해질 그때, 즉 새 창조의 때(6:15)에 대한 갈망입니다. 또한 우리는 “영으로써” 즉 사람의 몸에 새겨진 할례 표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공적인 지위를 받는 위대한 사건을 기다린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할례를 받는 것도, 할례를 받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가족의 일원이라는 육신의 표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핵심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바울이 지금까지 말해 왔듯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자신의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는 공허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믿음은 율법을 통해 일하는 믿음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일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종적 기원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하나님의 성도들을 모두 자기 가족으로 환영하시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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