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9. 15:25ㆍ갈라디아서강해
성경은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언급합니다(창 17장).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과 맺으신 언약의 표지였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물론 할례의 의미는 다르겠지만 유대인들만 유일하게 할례를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의 상당 부분은 이방인의 구원이 교회에서 할례가 주요 현안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바로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속한 집단과 부족과 당신의 민족에 누가 속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아주 초기 교회에서 할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남성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은 이후 곧바로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표지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던 것입니다.
2: 1-2,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우선 바울이 개종한 후 3년 만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하려 예루살렘에 방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보름을 있었지만 특별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거나 말씀으로 교제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1장에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후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4년이라는 것이 개종하고 난 후 14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루살렘을 1차 방문한 후 14년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고 합니다. 아마 처음 방문한 후 14년을 말하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단지 이때에는 이미 바울이 여러 곳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위치가 상당히 구축된 때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 전도의 열매 중 하나인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바울은 이때 자기가 올라간 것을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행 11:27-30). 본문은 바울이 복음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간 이유는 하나님이 예언적 ‘계시’를 통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이방 세계에서 전하던 것이 무엇인지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설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대 기독 신앙이 중심지와 연합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2:3-5,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바울은 예루살렘에는 “거짓 형제”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이 운동이 어떤 모습인지 보려고,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하면서도 모세의 율법 지키기를 귀찮아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보려고 몰래 숨어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곳에 그런 사람들이 일부 있었지만 자신은 그들에게 복음에 대해서는 잠시도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거짓 형제”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무엇을 감시하고 있었을까?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메시아를 믿는다고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바울의 대답은 긍정과 부정, 둘 다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유대인을 모든 다른 인종 집단과 구별되는 한 가족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들도 동일한 조건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점을 이 편지의 나머지 부분에서 다각적으로 자세하게 다룰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유로 특별히 할례 문제가 집중 부각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누가 정확하게 지키고 있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코셔 음식만 먹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또 그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지 정확하게 관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할례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알았던 것입니다. 할례는 받거나 받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즉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 이후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이야기하면서도, 디도와 그의 할례 문제를 애써 제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거짓 형제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또한 그가 전한 복음의 온전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이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할례를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전하지 않은 메시지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거짓 형제들은 바울이 할례를 전하지 않은 것은 시간이 없었거나, 아니면 전할 경우 갈라디아인들이 다시 돌아서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해서 그곳의 유대인 사도들과 진정한 교제를 누리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이스라엘 및 이스라엘이 소중히 여겼던 민족적인 제도들과 열망들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명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도록 끊임없이 유혹 하였고 예수님에게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유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나 이스라엘의 기득권인 대제사장 무리들과 싸운 것이 아닌 그들을 조정하는 사탄의 세력과 싸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형제”들 또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무리들이 아닐까?
할례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복음이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상의 주시라는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분이 온 세상의 주시라면, 그분을 믿는 이들, 그분께 충성하는 이들도 한 가족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국적이나 인종을 근거로 한 분열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교회가 바울의 교훈을 따랐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가 아닌 평화의 역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미래의 세대에게 전승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일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나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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