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0. 11:45ㆍ목회서신강해
오늘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고난을 함께 감당하라는 권면을 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의 세계에는 명예와 수치에 관한 일련의 규례들이 있었고, 모든 사람이 그것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바울의 세상에는, 사회 권력과 위신에 대한 등급 체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즉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관련이 있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며 마을의 상점이나 사업체에서, 특혜를 기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통치자들의 눈 밖에 난 이들은 거리의 보통 사람들에게 조롱받기 마련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조롱을 받는 계급에 속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감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다는 자체가 인간적인 비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 그가 왜 감옥에 갇혔는지 알았던 이들은 핵심을 바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가 갇힌 것은, 그의 행동과 말이 권력자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의 메시지, 즉 로마 제국 설립의 기초가 된 왕의 메시지와 충돌하는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황제를 주로 선포하고, 그에게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있다고 약속했고, 그의 통치에 순종하는 도시나 주에 황제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은 ’당시 실세의 눈 밖에 난 바울‘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나 동료조차도 그를 멀리하고 그를 부끄러워하는, 즉 왕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음을 바울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디모데도 그런 압박에 굴복하는 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유혹에 대한 해결책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이 짧은 구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3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로 ”우리 주를 증언함“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선포하고 증거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겠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 1:16). 이 능력은 약하고 힘겨운 상황에서 강력히 역사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고후 12:9-10). 둘째로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리어 기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에베소서 3:1에서 말한 바가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가복음 8:38에서 말한 것과 같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님 재림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한 고난에 기쁨으로 자신과 함께 동참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에게 복음에 대한 뜨거운 사명감을 일깨우고자 합니다.
1:9-10,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본절에는 죄의 지배와 오염으로부터 구원받는 전 과정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죄에서 구원을 얻었을 뿐만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고전 1:9). 이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거룩한 생활은 구원받은 자가 계속 이루어 가야 할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과 거룩한 부르심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밝히 드러나신 능력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 모든 능력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그 능력은 바울의 삶과 디모데의 삶을 변화시키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삶도 변화시키는 복음의 부르심 안에서 역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 왕이신 예수“를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로마 황제의 옷이 얼마나 웅장하든, 그의 군대가 얼마나 강력하든, 그 황제의 보잘것없고 허세를 부리는 ’나타남‘과는 대조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참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지위는, 세상의 구조자이며 구원자이라는(모든 폭군과 정복자들은 자신이 사람들을 ’구원하고‘, ’해방한다‘고 주장한다) 황제의 주장과 대조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나타낸 사건은 무엇보다도 그분의 부활입니다. 이는 그분이 어떤 기이한 기적의 주체였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이 황제와 모든 폭군의 최종 무기인 죽음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최고의 이교에서도 꿈만 꿀 수 있었던 것이 밝히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통과한 생명, 죽음의 권세를 넘어 새로운 실존으로 나아온 생명인 것입니다. 이는 위대한 이교도 철학자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단연 우월한 ’불멸성‘이었습니다. 이교도 철학자들 일부, 즉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은 사람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는 불멸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복음이 제시하는 불멸성은, 고통이나 질병이나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을 새로운 육체를 지닌 생명인 것입니다. 이 생명은 모든 인간이 자동적으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혜와 능력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이 전해질 때, 왕이신 예수님이 선포될 때, 사람들은 다른 누구나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본절에서 말하는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특별하거나 우리가 지금까지 특별한 방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게 되면, 즉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삶에서 그 능력이 역사하게 하시고 때가 되면 일어날 우리의 부활을 약속해 주시는 은혜와,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가치관 전체가 뒤집힐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전에 자랑했던 것들을 부끄러워하고, 이전에 수치를 느꼈던 것들을 자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개념인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바울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전령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갇혀 있고 다른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그렇게 신뢰했기 때문에 그 자신과 자신의 삶과 사역을 하나님께 맡겼고, 하나님은 그가 그분께 맡긴 것을 안전하게 지키실 것임을 안다고 12절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14절 말씀, 즉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라고” 권면합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성령으로 인한 아름다운 것을 잘 지키고 있는지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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