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41. 10:32-45.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

2023. 8. 14. 16:22마가복음강해

 

마가는 예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리셨는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이스라엘과 이 세상과 독자들에게 이 장면이 갖는 온전한 의미를 제시해 줄 몇몇 그림들을 독자들의 마음에 간직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독자들에게 알려줄 그런 몇몇 그림을 씨앗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씨앗들은 이후의 내용에서 싹이 터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고, 권력자들 앞에 서시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하실 때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단계에서는 그 씨앗들을 하나씩 따로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엄숙하게 경고하시면서 시작이 됩니다.

 10:32-34,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예수님의 경고는 세 번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칠 일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세례 때 들은 그 음성 이후부터(1:11)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음성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연상시키는데, 지금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예언을 다시 언급하십니다.

 이사야서의 해심인 40-55장에는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 같은 존재가 중심인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르는 그는 이스라엘과 이 세상의 죄를 위해 고난 받고 죽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런 결심을 안고 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가가 심고 싶은 두 번째 씨앗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그렇게 선언하신 이후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예수님의 깊은 생각에서 비롯된 소명의 절정이었다는 사실이 정통 기독교의 핵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메시아 여정을 영광을 얻으러 가는 행진으로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그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릴 때 그분의 양옆에 앉는 영광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힘들겠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이길 것이다”라는 뜻 정도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행복한 결말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힘든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권력과 권위를 뒤집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마가의 이런 주장은 정치적인 해석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씨앗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을 바로잡으시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바로잡는다면서 사실은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권력을 잡을 뿐인 모든 인간 제도를 도전하고 뒤집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오해한 이유는, 십자가만 빼고 예수님만 받아들일 길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도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류의 자만과 영광을 문제 삼습니다. 그렇기에 정치적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네 번째 씨앗입니다.

 10: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본문에 나오는 “잔”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세상의 사악함, 특히 이스라엘의 사악함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자초하고 있다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띱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는 곧 이방 군대가 와서 그분의 백성과 성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임무는 그 ‘진노’를 스스로 온전히 다 받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세례’는 이 책의 시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의 선두에서 고난 받는 메시아로서 자신의 소명을 따르게 되신 것처럼, 앞으로 임할 그분의 죽음도 일종의 세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의 물 아래로 들어가 죄를 용서받는 세례인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세례를 예수님의 세례와 연관해서 이해했다고 합니다(롬 6:3-11, 골 2:11-15). 마지막 씨앗은 예수님이 자신의 좌우편에 앉을 사람을 비꼬시는 듯한 말씀입니다(40절).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독자들은 몇 장 더 읽다 보면 그 내용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오른편과 왼편에 각각 사람을 두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마가는 진정한 왕의 영광이 어떤 모습이며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독자들에게 몇몇의 그림으로 보여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본문이 마가복음의 핵심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어떤 철학이나 개인의 경건이나 영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만약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 세상은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이 세상의 가치관과 권력 체계를 뒤엎으시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몸값으로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고 싶다면, 우리는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