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7. 12:16ㆍ마가복음강해
십자가는 원래 정치적 상징이었는데, 종교적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빌라도도, 무리도, 대제사장도, 예수님도 그 상징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지닌 권력의 궁극적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이곳 주인이다. 우리의 길을 막는 사람은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후 6년 경 갈릴리에서 로마 제국이 땅의 등기문제로 인한 세금 때문에 유다가 반란을 일으켜서(행 5:37) 갈릴리에서 수많은 유대인 반란자들이 십자가형에 처형당했습니다. 주후 70년 1차 유대전쟁 때에는 더 많은 유대인을 십자가형에 처했던 것입니다. 교양 있는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이나 ‘십자가’라는 단어를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잔인하고 참혹하고 혐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자랑하던 그 제국은 사실상 십자가 위에 건설되었던 것입니다. 마가의 독자들은 로마의 그런 소행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십자가형에 대한 그 당시 인식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5:1-2,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평소에는 빌라도는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의 관저에 있었지만 명절에는 치안유지를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빌라도의 관심은 재판에 있지 않고 반란이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유월절을 잘 넘기는 것이었고, 그 와중에 늘 자신과 사소한 권력 게임을 벌이려는 대제사장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확인시켜 줄 수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가의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일차적으로 정치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십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거짓 예언자는 얼마든지 매로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신성모독에 대한 소송도 쉽게 기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을 자처하는 사람은 정치적 문제를 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찾아서 체포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은 예수님이 흔히 볼 수 있는 메시아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알았음을 보여 주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혐의는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15:4-5,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보통 법정은 한쪽에서는 피고인에게 죄를 엄청나게 뒤집어씌우고 다른 쪽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변명하고 반박해 죄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이 그렇게 많은 죄목을 가지고 고소하는데도 일체 변명이나 반항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구약의 그 제물로서 자신이 바쳐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자신이 모델로 삼으신 이사야서 본문을 앞에서 소개했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그 종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으로 내어 준다”. 그 본문은 이 종이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않았던 것입니다.
15:6-8,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바라바는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반란군이었지만 유대인의 입장에서서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광신적인 우파 열성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수단으로 로마의 권력을 물리치는 것, 다시 말해 이교도의 폭력을 거룩한 폭력으로 되갚는 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한 자였던 것입니다. 이 같은 생각은 마가의 독자들이나 마가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그런 혁명 운동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바라바와 동일시하고 ‘하나님 은혜 덕분에 내가 살았구나’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바라바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시고 그는 풀려났습니다. 예수님은 무죄입니다. 빌라도마저도 예수님이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란을 일으키지도, 불화를 조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성전에 임하리라고 스스로 경고하신 그 운명을 맞이하러, 즉 로마의 손에 멸망당하러 가십니다. 예수님은 치유와 용서의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화목제물로 그 운명을 담당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라바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시대 조류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무력이 아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물같이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임하는 것이 다가오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거듭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인 것입니다. 즉 무력 투쟁이 아니 사랑으로 생각을 바꾼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개념인 것입니다. 즉 회개는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회개의 개념은 무엇일까? 맘몬의 신을 숭상하는 세상 권세에서 돌아서 하나님에게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가치관을 바꾸시기 위해 십자가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으로 인해 가치관이 바뀌었는가를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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