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23. 5:38-42. "눈에는 눈"

2022. 6. 28. 16:16마태복음강해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빛이 되고 이 땅의 소금이 되기 위해서 선택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 선택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이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열고 계십니다. 그 소명을 향해서 길을 내시면서, 제자들을 재촉하시며 그 위험한 길을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그 길은 위험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에게는 외부의 적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땅을 정복하고 가혹한 법을 강제하며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이방 민족이라는 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위험은 많았습니다. 가중되는 불의와 악에 대한 분노로 촉발된 민족주의적 저항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소수는 아주 부유해지고 다수는 가난해지고, 더러는 극심히 가난해지면서 유대 사회 내부의 분열도 커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또 새로운 종류의 정의를 제시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옛 정의는 복수에 몰두하지 않게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양측이 서로 점점 더 큰 해를 입히며 분쟁이 커지는 것보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나은 길을 제시하십니다. 복수를 아예 하지 말고 놀랍도록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건설적인 길을 택하는 편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추어서 모든 민족이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넘쳐흐르는 사랑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출 21:24)라는 율법 규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누군가가 나에게 신체적인 피해를 입혔을 때 내가 피해를 입은 만큼 상대편에게 합법적으로 복수할 수 있는 규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으면 피해를 입은 만큼 갚아 주어야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본뜻을 전적으로 잘못 생각한 것이며, 그 결과 더 깊은 증오심을 가지게 하고 또 다른 보복을 일으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결코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며, 오히려 나에게 어려움을 준 사람에게 더 잘 대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입으면 상대방에게도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분노가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친 만큼 나도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도 된다는 말씀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반대의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누군가가 나에게 신체나 재산상의 손해를 주었을 때 절대로 사적인 보복을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법적으로 해결하고, 재판을 할 때에도 죄질에 타당하게 벌을 주어야지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대개 신체 상해는 돈으로 보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랍비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 규정을 누군가가 신체적 피해를 입었을 때에는 법적으로 피해 보상을 받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다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 귀를 의심하게 됩니다.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의 심우한 뜻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 세 가지 단서를 주십니다. 당시 사회에서 오른뺨을 맞는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게 오른쪽 손등으로 맞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폭력이 아니라 모욕이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맞는 사람이 열등한 자임을 의미했습니다. 어쩌면 노예이거나 아이이거나 여자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똑같이 때리면 악순환만 낳을 뿐입니다. 다른 뺨도 댄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원한다면 나를 다시 때려도 좋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를 열등하게 가 아니라 대등하게 보고 때려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권세 있는 원수가 당신이 그에게 큰 빛을 졌는데 그것을 갚지 못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는 당신을 고소해 놓고 법정에서 당신의 속옷을 벗겨 가려 한다가 칩시다. 당신은 그를 이길 수 없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사실상 무엇인지는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에게 “당신의 겉옷도 벗어 주라”는 것은,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겉옷과 속옷 두 가지만 입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빼앗겨 벌거벗겨진 모습으로 그에게 수치를 주라는 것입니다.

 셋째 예는 분명 로마의 군사적 지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에게는 민간인에게 자신의 짐을 지우고 1마일(1,6kn)을 강제로 가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규칙은 엄격해서 1마일 이상은 가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판을 뒤집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씩씩거리고 안달하며 복수할 계획을 세우지 말고. 1마일을 더 가주어서 그 군인이 놀라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는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상관이 이 사실을 알면 그를 문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세 가지 예를 드시면서 폭력과 불의에 맞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승리를 거두는, 그러한 방식이 있다는 새로운 소식을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관대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5:42 “내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이것은 무조건 구걸하러 오는 자에게 가진 것을 다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 절에서 언급한 세 가지 예를 들고 난 후 본문을 이야기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냉정하거나 인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사정할 때 조금씩 들어주고 봐주기도 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단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우리는 이를 듣기 좋은 이상주의로 여기고 잠시 감탄할 수는 있겠지만 이내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전부 예수님 자신이 직접 대면하셨던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의 삶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지금 우리들에게 결론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하라고~

 이 시간 나는 지금 예수님이 가신 길을 잘 가고 있는지를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