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29. 12:20ㆍ마태복음강해
산상수훈은 단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우리는 이를 듣기 좋은 이상주의로 여기고 잠시 감탄할 수는 있겠지만 이내 우리네 일상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생애의 청사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전부 예수님 자신이 직접 대면하셨던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 지를 보여 주는 길이라면 마태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임마누엘을,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그저 어떤 행동이 올바른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사랑을 보여 주시고 죽으신 예수님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 절실한 사랑을 우리가 직접 그 사랑을 나타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웃의 개념의 분명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오직 유대인들뿐이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이웃은 혈통상의 유대인이나, 아니면 할례를 받고 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이 말씀은 레위기 19:18절 말씀을 상당히 변형시킨 말씀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도리어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는데 유대인의 선생들은 ‘네 몸처럼’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씩 변형시킨 이유는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네 원수가 아무리 너에게 나쁜 짓을 해도 원한을 품지 말고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원수를 미워하라’고 한 것은 이방인들을 멀리하고 차별화시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의를 지키기 위해서 첨가한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접촉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결례라는 것을 행했는데 이것은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혹시라도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이 접촉되었을까 봐 물을 뿌리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차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예배를 주셨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이방인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은 ‘거룩’, 즉, 구별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이 아닌 자들은 거룩한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과 접촉함으로 죄가 감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기들에게 의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배워 왔던 것을 완전히 뒤엎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원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를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간의 본능까지도 뛰어 넘어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본문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인데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경배하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다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가 예수를 알기 훨씬 전부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지켜 주셨습니다. ‘죄’란 것이 인간들에게 들어 오기전의 모습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 즉, 악인이나 선한 사람들이나 다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여기서 두 가지 예를 드십니다.
5:46-47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여기서 ‘너희를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잘해 주고 나에게 유익한 사람과만 친하게 지낸다면 그것은 세리나 죄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이기적이며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사람들이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세리들도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해 줄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발전하면 끼리끼리 문화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에서도 많은 파벌이 생기고 분란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가 본문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우리는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온전할 수 있을까? 그것이 마태가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하려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는 하루아침에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영혼과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된 몸은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아직 옛날의 버릇과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의 본성보다는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치루어야 할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그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날에는 우리는 원수를 용서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지만 우리의 본성이 너무 강해서 성령님을 이기는 날에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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