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3. 13:47ㆍ마태복음강해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가 가까워지니까 제자들은 자기들 사이에 서열을 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면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지를 미리 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지금까지 제자들 사이에 순위가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통해 칭찬을 듣고(16:16), 세 제자가 뽑혀 변화산에 올라가고(17:1), 납세 문제에서 베드로가 대표 격(17:23-27)이 되자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크냐? 문제가 큰 이슈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소명을 모르고 있다고 마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회개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3 년 동안이나 따라다녀도 거듭남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의 거대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 출석한다고 다 거듭난 성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회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인가?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시간이 충분하니까, 그러므로 성경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우리들은 잘 알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18:3-4,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대 사회에서의 어린아이들의 지위는 매우 열악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사춘기가 될 때까지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더 수난을 당했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여자아이는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신약이 기록된 헬라어를 포함하여 일부 언어에는 ‘아이’을 일컫는 단어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인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아이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2절에 나오는 아이라는 헬라어의 원어가 중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이정표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연약하고, 취약하고, 작은 인간이라고 말씀하실까?
아마도 제자들은 영웅같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과거의 영웅들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영웅들은 믿음과 소망과 더불어 군인으로서의 용기와 또한 전투에서의 승리가 그러한 사람들의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택하셨습니다. 수줍어하고 연약하며 아직은 자아가 불안정하지만 사랑받고 사랑하고, 배우고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큰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연약함과 취약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가 쉽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상에서 교만과 오만은 그 어떤 것보다도 인간의 삶을 왜곡하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는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5절).
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 교훈을 배우는 데만 관심을 두시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것은 은혜와 지혜 가운데서 자라 가고 하나님 나라의 큰 사람으로 자라 가는 것이 핵심이라고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이 그저 즐겁게 뛰어놀면 된다는 낭만적이고 안이한 생각을 하시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잘 신뢰하고 열정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크게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으레 하시듯 과장법을 써서 노골적으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연자 맷돌은 여인들이 집에서 사용하는 작은 맷돌이 아닙니다. 연자 맷돌은 ‘나귀 맷돌’의 뜻입니다. 즉 나귀가 끌면서 돌리는 큰 맷돌입니다. 로마인들은 부모를 죽이거나 큰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목에 큰 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뜨리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바다를 무서워했으며, 그러므로 물에 빠져 죽는 것을 그들에게는 저주였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존재방식은 어린 아이처럼 약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착취에 탐닉하는 사람들에게 본문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처럼 우리가 ‘큰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그 어떤 말씀보다도 엄한 경고입니다. 그러한 죄도 심각하지만, 작은 사람 하나를 ‘실족하게 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것을 훨씬 더 심각한 죄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배운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실제 악을 대면하고, 하나님은 그 악을 우리가 싫어하는 것보다 더 싫어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가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보여주는 지침서인 것입니다. 이런 지침서를 잘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이 시간 나는 하나님 나라의 지침서대로 잘 가고 있는지를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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