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20. 21:12ㆍ사도행전강해
오늘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에 사역의 절정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을 통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에베소는 세상 권세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바울의 사역은 주 예수의 이름의 권세가 에베소 사회를 움직이는 모든 권세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치유를 일으킬 만큼 강했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9:11-12,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바울이 에베소에서 쓴 편지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18, 24-25, 2:4-5, 4:20에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 고 언급한 것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나타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행해진 구체적인 기적은 육체의 병을 고치는 것과 악한 영을 내어 쫓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에 의한 영혼의 구원은 이런 현상을 통해서 확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손으로 하는 천막 짓는 일을 했으므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자(막 5:27-34)와 베드로의 그림자(행 5:15)를 생각나게 합니다.
19:13-14,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우리나라 초대 선교사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현장에 무당들이 많이 왔다고 합니다. 그 무당들은 예배가 끝나고 선교사들에게 성경을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큰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자신이 행하는 굿판에 사용을 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술 하는 유대인들은 보통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솔로몬이나 아브라함, 야훼 등의 이름을 부름). 그리고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에베소에 있던 요한의 제자들만큼이나 수수께끼입니다. 공식 유대인 대제사장 중에 ‘스게와’라는 사람은 없었으며, 어쩌면 오랫동안 이방인의 땅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유대교와 이방 종교의 혼합물, 종교의식과 마술의 혼합물을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는 본문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복음이 능력을 주기는 하지만 ‘마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건은 당연히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값비싼 마술 책을 불태우고 자신들이 한 일을 고백하며 포기하기로 선언한 사건입니다. 이들은 “유대마술사들이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도리어 공격을 받아 도망하는 것을 보고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는 사람들이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16~18).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 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당시 책은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일일이 손으로 썼기 때문에 값이 매우 비샀다고 합니다. 은화 5만은 현재가치로 약 1천여만 원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마술에 속아 엄청난 돈을 지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술의 주문이 기록되어 있는 책들을 태워버리는 것은 공적으로 그 책들의 가치와 권위를 부인한다는 단호한 표시이기도 합니다.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황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바울은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몸소 체험하면서 본절의 교훈을 터득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전하는 많은 서신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런 것을 배우는 과정 또한 힘들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 동안에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머물던 시기에도 많은 박해와 고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사역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력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자신의 철저한 연약함을 통해 가장 탁월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바울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로 앞에 일어난 일들인지(11~20절) 아니면 에베소서 2년 동안 행한 일(10절)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전도 사명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고 새로운 선교지를 계획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무렵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린도 전, 후서에 그 전도의 상세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고전 15:30-32, 고후 1:8-10). 사실상 에베소에서의 전도는 고난과 위험의 연속이었지만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난 후 바울은 다음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은 고린도전서 16:5-7절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즉, 바울의 계획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다시 방문한 후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로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로마로 가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무대인 에베소에서도 바울은 많은 고난을 당했다는 것을 바울의 서신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과정을 도외시하고 결과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잘못 해석하면 복음의 능력을 병 고침과 귀신 물리침으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술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무당도 할 수 있고 미개한 나라의 무당들도 그런 일들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은 사울일때도 성경말씀을 잘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왜 에베소에 있는 바울처럼 능력을 나타내지 못했을까? 를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유대사회에서 인정받는 랍비가 되어 아주 편안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종으로 삶은 끊임없는 고난의 연속적인 삶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바울은 이런 삶을 통해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도 자신의 연약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울일 때 바울은 아마도 자존감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인 지금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연약한 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연약함이 있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즉 성경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의 긴 여정이 영성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나의 연약함을 깨닫고 있는지 그래서 성경 말씀이 나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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