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요한계시록강해]#8. 3:7-13. "빌라델비아 교회"

2025. 2. 25. 16:35요한계시록강해

 

오늘 본문은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을 받지 않았던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장점이 순교였다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역경 속에서도 굳건히 믿음을 지킨 것이었다고 합니다. 1세기 중부 터키는 지진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합니다. 계시록이 쓰이기 550년 전 혹은 더 이전에 빌라델비아는 최악의 지진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어. 황제의 허가를 받아 재건했다고 합니다. 그 시대의 거대 도시에서 고급 공공건물, 즉 신전과 같은 건물은 그런 위기에 특히 위험했을 것입니다. 이런 지진과 붕괴된 신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빌라델비아 같은 도시에서, 이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그 교회에 어떤 효과를 줄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성전은 돌이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성전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저작에서처럼, 이것은 예수님 자신을 기초로 삼은 살아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진 성전인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기독교 신앙의 맨 처음 시기부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첫 그리스도인들은 부분적으로 예수님 때문에, 또 부분적으로 성령의 은사 때문에 자신들을 참 성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자기 집으로 삼으신 곳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간혹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기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2:9), 이 비유는 교회가 새 성전이라는 개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빌라델비아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진의 위험으로 악명 높았던 도시에서 말입니다!

 3:7-8,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빌라델비아는 사데 동남쪽으로 약 40km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서머나와 서북 아시아, 브루기아(16:6)을 잇는 도로를 끼고 있어서 지리적으로 요충지로 크게 번영하였으며 직물과 피혁, 포도 생산지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또한 일곱 교회들 중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이 성의 11명의 신자들은 서머나에서 폴리캅과 함께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암미아라는 예언자에 의해 큰 부흥이 일어났었다고 합니다(AD100~160).

 요한은 예수님을 이사야 22:22에서 하나님의 집을 관장하도록 임명된 청지기처럼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곧 어떤 문이든 열거나 닫을 수 있는 왕궁 열쇠인 것입니다. 이 왕권을 소유한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그리스도인들 바로 앞에 한 문을 여셨고, 그들에게 그 문을 통과하라고 촉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동일한 그림을 사용하듯이(고전 16:9, 고후 2:12, 4:3), 이것은 그들이 굳게 설 수 있는 기회뿐 아니라 전진할 수 있는 기회, 예수님의 복음이 아직 닿지 않은 지역과 마을에 그것을 가져갈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의미인 게 거의 확실할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격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상당한 힘을 가졌습니다. 아주 많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지원에 힘입어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신실하게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도 모종의 박해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용기를 갖고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3:9-10,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빌라델비에도” 영향력이 있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사데가 당시 유대교의 주요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서머나에 보낸 편지에서처럼, 우리는 여기서 회당 공동체가 공적 지위를 이용해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 아주 유대적인 동시에 그런 만큼 유대 백성에게 도전을 제기했던 그 메시지의 전진을 차단하고 있었다는 암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많은 도시처럼, 한쪽 거리 모퉁이에 교회가 있고 다른 쪽 모퉁이에 회당이 있다고 상상하면 안 됩니다. 아마 기껏해야 20-30명 남짓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다는 대단히 개연성 없고 극도로 위험한 주장을 고수하는 교회를 상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절은 서머나 편지(2:9)의 해당 내용보다 상당히 더 매정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반유대주의기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접하는 내용은 이른바 유대인 내부의 질문인 것입니다. 이 두 그룹 중 누가 옛 하나님 백성의 횃불을 들고 있는 참 유대인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 이것은 1세기 유대교의 다른 분파에서 상당히 흔한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십니다. 다윗계 메시아인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참 유대인이라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온 땅에 시험의 때가 다가오고 있어도 그 인내에 대한 궁극적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진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 성전의 기둥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3:11-13,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의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말라기 1:2에서 하나님은 배반하는 이스라엘에게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과 야곱의 형제 에서의 후손 에돔을 대조하며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고선언하십니다. 이제 본문에서 비슷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 믿지 않은 회당은 메시아 예수님이 자기를 믿는 이 작은 그룹을 사랑하셨음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 예언은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와서 절하며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음을 인정할 때에 대해 얘기했지만,, 이제 반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2장의 야곱의 형제들처럼, 유대 백성은 전에 멸시했던 예수님 앞에 경배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열린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고, 새 성전에서 기둥이 될 사람들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새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 하늘의 예루살렘, 그리고 왕이요, 주님이시라는 새 이름을 지닌 예수님의 삼중직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의 백성, 또 하늘과 땅이 영원히 연합될 그 도시의 시민이라는 공적 표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붙들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을 계속 그렇게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을 헤쳐나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예수님의 복음을 잘 붙들고 있는지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