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18. 15:35ㆍ요한복음강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시는 내용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체포되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가 요한복음에서는 없습니다. 요한은 이미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의 마음이 몹시 괴로우셨음을 보여 주었습니다(11:33,12:37, 13:21). 이제 그 고뇌의 순간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18:1-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온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창세기 2장과 3장에 나오는 동산의 아담 이야기가, 본문에서는 배신의 동산의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일종의 ‘새로운 창세기’를 쓰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특별하고 결정적인 장면에서, 독자들이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육체, 아담의 육체, 새 창조의 육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숨지 않으십니다. 그럴 까닭이 없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마실 잔을 주셨고, 그분은 그 잔을 마시려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다가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3~4절).
18:5-6,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예수님은 상황을 주도하시면서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곳곳에서 “나는 ···이다”라고 말한 요한은 독자들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니라”란 말씀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동등한 분이시다. 그분은 ‘스스로 있는 자’(출 3:14), 생명의 빵, 세상의 빛, 부활이요 생명, 길, 진리이시다. 이런 의미일 때에만, 체포하러 온 일행이 뒤로 물러나 땅에 주저앉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했던 반응은 성경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때 하는 행동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은 그냥 보내주라고 그들에게 말합니다(8~9절).
18:10-11,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아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베드로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마 16:17), '바요나‘란 뜻은 ’ 요한의 아들이란‘뜻이지만 그 당시 속어로는 ’열심당원‘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칼을 항상 가슴에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까지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는 무력으로 혁명을 이루고자 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추구하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사랑이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샬롬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반란을 주도했던 수많은 자칭 메시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1차 유대전쟁(66~70)과 2차 유대전쟁(132-135)을 치르고 나서야 이스라엘은 더 이상 유대 땅에서 혁명을 할 수 없었고 디아스포라로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수모와 박해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 수많은 혁명가를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샬롬을 부르짖은 사람은 예수님이 유일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약성경이 말하는 ’회개‘(막 1:15)란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란 우리가 지은 죄들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시대조류를 거스르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 당시 시대조류는 다윗과 같은 강력한 메시아가 나타나서 무력으로서 혁명을 꾀하여 이방세력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일대를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새 시대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회개를 하지 않은 결과 그들의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회개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적용이 되는 것일까? 바로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즉 돈, 권력, 명예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가치관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거듭남‘을 알 수 있는 기준은 나의 가치관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면 되는 것입니다.
18:12-14,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더라”예수님은 방금 전 새로운 이스라엘의 참 대제사장으로서 중요한 기도를 끝마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제 대제사장 가문의 선임자인 안나스와 현 대제사장 하나인 그의 사위 가야바 앞으로 끌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11:49-50에서 가야바가 했던 말을 상기시킵니다. 참 대제사장이 거짓 대제사장의 손에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참 아담이 거짓 아담의 손에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이로써 동산은 회복되고, 피 흘림 대신 치유와 용서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맞이한 하나님의 샬롬이 넘치는 세상을 만끽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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