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히브리서강해]#23. 9:11-14. "영원한 제물"

2024. 11. 8. 17:13히브리서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의 희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더 크고 완전한 장막을 통해 대제사장으로 오셨으며 이는 인간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의 창조물과 다른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성소에 들어가셨으며 이를 통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죽은 행실에서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데, 이는 구약의 제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정결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희생은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었는데 이는 반복적인 제사와는 달리, 한 번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었다고 저자가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새 언약이 예수님 안에 도착했다는 설명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전반에 흐르는 강조점은, 독자들이 자신들의 옛 언약, 즉 본래의 유대교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대가가 얼마가 되든 예수님의 백성에 속하는 자격을 계속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곧 메시아의 도래와 더불어 약속된 새 세상이 활짝 열렸고, 새 세상은 모든 면에서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9:11-12,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8징 서두에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광야 장막을 계승한 성전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줄곧 염두에 두셨던 그 실체, 하늘의 영역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짜 임재였던 궁극적인 성소 혹은 장막의 임시 대체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손으로 만든 지상의 건물은 단지 그 실체를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성전의 대제사장 같은 사람이 앞서가서, 우리가 정결하다는 표식을 보여 주며 우리가 들어가도 좋다고 판정받았음을 증명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표식이 바로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이유인 것입니다.

 메시아가 정기적으로 행해진 동물 제사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하나님 앞에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이 서신 전체에서 가장 놀랍고 충격적인 개념일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신약성경과 동시대나 그 이후의 방대한 유대교 문헌에서 누구라도 인신 제사가 좋은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메시아 자신이 그런 희생 제물이 될 것이라는 건 그만큼 충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의 희생적 죽음을 얘기하는 이사야 53:10의 인상적이고 신비로운 본문 이외에, 유대교에서 그런 개념에 가장 근접한 것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 이야기일 것입니다(22). 그러나 창세기 22장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삭을 실제로 죽이지 못하게 중단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즉 인신 제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과 제물 자체, 둘 다가 되어야 한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런 개념이 신성 모독처럼 비치거나 비웃음을 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희생 제사가 내포하는 깊은 신비의 핵심에 독자들을 데려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희생 제사에는 가치 있고 순결한 것을 바친다는 인식을 저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감사하며 바친다는 표식이라는 인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 제사는 피로 상징되는 희생 동물의 생명이 쏟아져 죽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악함과 불결함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사실상 몰수당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 대신 죽음에 내줄 생명을 제공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표식이라는 인식입니다. 또한 희생 제사는 앞의 두 가지 표식을 통해 우리의 현재 부정한 상태가 씻겨,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한 정결한 상태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는 인식이 저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자가 인식하는 요소들을 고대 이스라엘의 희생 제사의 의미에 버금가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메시아의 죽음이 더 좋은 실은 최종적인 단 한 번의 제사로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즉 인간의 대표자로서(2) 예수님이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쳐 순종 가운데 죽음에 내려놓으신 것은 인류 전체의 제사로서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내준 그분의 생명도 우리를 위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분이 죽으셨고, 따라서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옛 동물 제사는 예배자의 외적인 삶을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했지만, 대표자 메시아로서 그리고 참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바친 예수님의 제사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정결 효과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희생 제사가 더 좋은“ 이유로 우리를 이끄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인간의 내면에 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임재의 진짜 중심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은 단순히 사람이 만든 건물의 내부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과 거룩하심 가운데 살고 계신 그곳에 가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희생 제사의 효과는 몸과 관련해 다시 교제를 회복하거나 ’정결‘해진다는 측면에서 그분의 백성들이 외적인 생활만이 아니라. 각 사람의 ’지성소‘, 우리가 정말 자기 자신인 그곳에서도 감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정결은 우리를 죽은 행위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앞서 6장16장 1절에서 보았듯이 죽은 행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회개하며 돌아섰던 이방인의 관행, 그리고 그 자체로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이지만 가령 죄와 죽음을 해결하라는 요구 사항을 실제로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유대교 의식의 정기적인 반복을 모두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단 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저자는 독자들에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붙잡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죽은 행위에서 벗어나 살이 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