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19. 17:29ㆍ출애굽기강해
빌립보서 4:12-13,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 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우리의 생활여건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적 상태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하나님을 체험한 그때도 똑같았습니다. 나의 어려운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서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 기쁨, 편안함, 사랑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런 내면의 세계가 불안하다든지, 불평이 나온다든지, 혈기가 올라온다든지 하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느끼지 못할 때가 가장 큰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족하다는 마음을 생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영적 전쟁이 시작되든지 아니면 항상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홉 번째 흑암 재앙입니다. 다른 재앙과 달리 심리전입니다. 그런데 이 흑암 재앙은 다른 재앙보다 더 애굽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애굽인들에게 있어서 태양신은 신들 중에 가장 큰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로 또한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이런 태양이 삼일 동안 떠지 않았으니 그들은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 한 번 생각해보세요, 고센 지방은 환하게 밝은데 나머지 지방은 흑암으로 가득하였으니 이 얼마나 구별된 것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같이 세상과 구별된 자들인 것입니다.
10:21-2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이 재앙은 '사막의 바람'으로 몹시 뜨거운 폭풍과 일식을 동반해 내려진 재앙인 듯합니다. 거친 폭풍우와 칙칙한 습기로 인해 집안에 있는 불빛까지 꺼지게 되므로 사람들은 깊은 골방에서 공포에 떨며 폭풍이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뒤따라 올 죽음의 밤을 예견케 하는 전조적인 재앙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흑암 재앙은 애굽이 자랑하는 모든 신과 사상과 철학을 송두리째 흑암 속에 묻어버림으로써, 여호와만이 홀로 온 세상의 주관자 되심을 명백히 선포한 계시적 측면을 지니기도 합니다. 여기서 애굽의 흑암은 하나님의 진노를(계 16:10), 이스라엘의 광명은 하나님의 은총을 각각 상징합니다(엡 5:8)
10: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 본문에서 “머물러 두고”는 '공탁하다'는 뜻으로서, 돌아오겠다는 담보로 가축을 두고 갈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바로는 아무런 생계대책 없이 떠나려면 떠나보라는 식으로 출애굽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여호와께 드릴 희생제물마저 가져갈 수 없다는 의미로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목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발언이었습니다.
10:26,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거기'는 출애굽에 대해 첫 약속이 주어졌던 시내 산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제사 제도에 관한 지시(레 1-7장)를 받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들려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본절의 의미는 가축 한 마리도 애굽에 남겨둠 없이 다 가져가야 되겠다는 뜻을 다시 한번 완곡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10:28-29"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은 죽으리라 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이 말은 돌이킬 수 없는 바로의 완악함에 대해 하나님의 전권 대사 모세가 그 권위로 바로에게 단호히 선포하는 결별 선언입니다. 따라서 이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제 끝났습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바로의 면전에서 계속 머무르면서 마지막 재앙에 대한 무서운 경고를 하게 됩니다. 반면 이것은 바로에게 주어진 회개의 마지막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악인이 멸망하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죄에 대한 억척스러운 고집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 어려운 출애굽 과정을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출애굽 후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면서 출애굽 세대는 다 죽고 그 다음 세대가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요단 강 동편에서 전투를 앞두고 모두 할례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며칠 동안 전투력이 상실됩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의 믿음이 컸다는 것입니다. 아마 성경 전체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가장 좋을 때였을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는 급속히 가나안 문화에 종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출애굽한 이후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들의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어서 이방신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칭의'에 속합니다. 출애굽 후는 '성화'에 속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성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칭의'가 없었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칭의'하지 않으셨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는 '칭의'를 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칭의'를 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일까? 바로 내가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씨앗이 없으면 영적 전쟁을 치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의 내면의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가? 그리고 나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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