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6. 3:11-17. "세례를 받으시다"

2022. 6. 2. 16:00마태복음강해

 

요한은 그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큰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분은 너희에게 단지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바람과 하나님의 불을 주실 것이다! 그분이 너희를 선별하실 것이다. 이 혼탁한 세상을 정리하셔서 좋은 알곡만 남게 하실 것이다”라고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시는 내용입니다.

 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요한은 자신이 하는 물세례는 사람들의 죄를 회개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회개를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세례 받은 사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곧 자기보다 훨씬 높은 분이 오셔서 자기 죄를 자백하고 세례 받은 자에게 성령과 불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분이 얼마나 높은 분인지 자기는 그분의 신을 들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종들 중에 가장 낮은 종이 주인의 신을 관리했는데 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낮은 종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겸손한 태도입니까! 이것이 사역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역자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가 진정 겸손을 안다면 세상은 그렇게나 교회를 비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은 손이나 더러운 그릇을 씻어서 깨끗하게 합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 같은 것은 물로 씻어서는 안 되고 불로 태워야 합니다. 불은 물처럼 외부만 씻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까지 철저하게 녹여서 찌꺼기를 제거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같은 역사’는 사람의 본질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농부가 곡식을 타작하면 알곡과 쭉정이가 뒤범벅되어서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 농부가 손에 키를 잡고 알곡을 까불면 알곡은 남고 쭉정이는 모두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농부는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넣고 쭉정이는 모아서 땔감으로 사용합니다. 요한은 지금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오면 우리를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심판도 하신 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 백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전 지역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3:13-14,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요한이 얼마나 놀랐을까? 마태는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이 오래전에 선언하셨고 계획하셨던 그 약속을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바람, 하나님의 영을 온 세상에 불게 하시겠다는 약속이고, 어디든 악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의 불이 임할 것이라는 약속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떠한 유배의 상태에 있든 거기서 그들을 영원히 구출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신 분이 지금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것입니다. 마태는 지금 그 약속을 지키려면 반드시 이 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쳐 복종시켜서 죽인다는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십자가 죽음의 예비적인 의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모든 인간의 대표 자격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의 대표로 죽으셨을 때 예수 믿는 우리는 모두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모두 새사람으로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십자가는 우리와 예수님을 하나로 묶는 매체입니다. 결국 ‘의’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법정적 칭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 자체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다만 구원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이제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5:22-23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짜로 ‘칭의’를 했다는 것은 우리가 ‘성화’의 과정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성화’의 과정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 율법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장자라는 신분을 확인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물에서 올라오신 후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바람, 하나님의 숨결을 새로운 방식으로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화된 이스라엘이라는 선언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성령의 구현이자 상징으로 등장하는 비둘기는 앞으로 있을 심판이 전쟁이나 징벌의 영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세심하게 주시하는 법을 배우면, 우리의 진정한 갈망이, 우리의 표면적 흥분 이면에 있는 굶주림이 풍성하게 채워짐을 발견할 것입니다. 또한 회개와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면 예수님이 들으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추구하고 있던 세상적 가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면 하나님의 큰 실체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확인해 주시고, 그분의 영으로 우리 또한 깨끗하게 준비시킬 것입니다.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영성’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