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후서강해]#14. 5:6-10. "최후의 심판"

2024. 5. 23. 10:47데살로니가강해/고린도후서강해

 

오늘 본문은 모든 사람이 메시아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은 메시아 앞에 서서.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기 몸으로 행했던 일들에 대해 보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편지에서 그리고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최후의 심판에 대한 가장 선명한 선언 중 하나인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린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 최종 목적지로 하늘에 가는 개념은 엉뚱한 상상으로 사람들을 기만할 수도 있습니다. 즉 기독교는 사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사람이 몸을 떠나서, ‘영혼이 구원받거나 상실되는 비육체적 상태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죽은 직후가 아니라 미래에 놓인 위대한 부활의 날에 우리에게 새로운 몸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2:1-1614:14에서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모든 사람이 각자 스스로 해명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6-8,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했지만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육신이라는 제한성 때문에 주님에게서 떠나 육신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 예수를 알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주에게서 떠나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얽혀 있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두 영역인 하늘과 땅이 지금은 하나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최종 목적 속에서 앞으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될 테지만 말입니다(21). 당연히 그 새로운 세상의 주된 특징은 새로운 창조의 중심부에 예수님 자신이 직접 왕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간에 그들이 죽을 때, 왕실 가족들,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사람들(1:21)은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만물이 새롭게 되는 즉 새 창조의 그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1:23에서 세상을 떠나서 메시아와 함께 있고픈자신의 바람을 말했던 이유가 그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 고난에서 놓여나는 영광스럽고 반가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의 삶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의 반대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날마다 신뢰하며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그런 일을 믿는 우리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증거가 어디 있느냐? 그들은 묻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명확하다면, 아니 어떤 식으로든 입증될 수만 있다면, 믿음이 들어설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과학일 것입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은 이성의 끝에서 출발한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유의 확실성이 내게 있다면,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회의의 반대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기에,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것도 깊이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고, 따라서 우리는 온갖 종류의 일들을 유보 상태에 두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예수님이 진정 세상의 참 주님이시고, 그런 칭호를 내세우는 다른 신들을 틀렸다고 단언하는 비타협적이 복음 자체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생각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5:9-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믿음에 대한 칭의를 말하는 바울이 본문에서는 앞으로 우리가 그분 앞에 서서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이나 배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이율배반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럼 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은 바울은 행위에 따라있을 미래 심판의 실재를 늘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이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믿을 때, 미래의 판결이 현재 속으로 앞당겨 온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하나님이 윤리적 행위를 전혀 문제 삼지 않기로 작정하셨고, 믿음을 지니기만 하면 내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바울이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말할 때(8:1), 그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메시아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 안에있는 사람들에게는 궁극적인 정죄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메시아의 백성들에게 주셨고, 성령께서는 그들을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이 이미 의롭다고 선언한 백성들이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그리스도인의 자격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이 내면에 거하고 있는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령님이 죄를 짓지 않게 하시는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 용어로 죄의 지양성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죄에 대해서 우리의 인격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된 몸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내면에서는 끊임없는 영적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내면에서 우리의 본능과 성령님과의 전쟁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성령이 충만치 못하면 우리의 본능대로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들을 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무효가 될까? 이에 대해 로이드 존슨 목사는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우리가 산에 오를 때 8부 능선에서 넘어졌다고 해서 다시 밑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기도하여 구할 것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나의 영적 전쟁의 승률은 어떠한 가를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