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후서강해]#13. 5:1-5. "부활 희망"

2024. 5. 22. 14:55데살로니가강해/고린도후서강해

 

앞장에서 겉사람과 속사람,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을 비교함으로써 부활의 소망과 영원한 소망에 대해 언급하고 난 후 본장에서는 또다시 땅에 있는 천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써 육체는 썩어질 것이지만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발걸음을 옮길 것을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땅에 있는 장막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집이 비교되는 이야기입니다.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본문에서 하늘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미래의 몸을 마련해 두신 장소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두 가지 개념을 사용합니다. 먼저, 바울은 몸을 장막 집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현재의 몸이 적절한 때에 더 나은 몸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또 몸을 입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두 가지 사실을 모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 혹은 장막의 개념은 그에게 자아가 한 거처를 잃고 다른 거처를 얻는다고 생각할 여지를 준 것이 사실이지만, 더불어 이 개념은 이동의 목적이 완전히 몸을 포기하는 게 아님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47-49에서 말했듯이 현재 형태의 인간의 몸은 흙에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그 몸이 땅의 재료로 만들어졌고, 현재의 땅에 속해 있으며, 결국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의미에서 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고린도전서 15:44과 46절에서 영이 깃든 몸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몸은, 하늘 곧 하나님의 공간과 영역에서 기다리고 있고, 또 결코 낡지 않을 재료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손으로 지은 것은 아니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주시거나 만드신 어떤 것을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것과 대조시키는 유대식 숙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몸은 일면 현재의 몸과 비슷하면서 다른 면에서는 사뭇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어떨지 정확히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장차 올 몸의 모형이자 원형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5:2-3,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우리가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바울은 몸에 의 개념을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같은 내용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미래에 대한 기독교의 희망은 육체를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다시 입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벗은 몸을 드러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란 뜻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을 만큼 해석하기가 힘든 구절이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주석가들 사이에서 소위 중간 상태, 즉 죽은 후 부활하기까지의 상태를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본문에는 중간 상태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사람들은 벌거숭이’. 아무 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영이나 영혼으로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옷을 벗기를 바라지 않고, 옷을 더 제대로 갖춰 입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과 연관지으면, 그가 염두에 둔 변화는 곧 현재의 몸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타락과 부패로 향해 가는 죽을 운명유한한것인 반면에, 장차 주어질 몸은 어떤 것도 해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생명으로 충만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4-5,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본문에서 을 벗지 않고 추가로 입기를 원하다는 바울의 말은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옷을 입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숙함과 결부된 수치심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되지만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모든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우리가 이 몸보다 고귀하게 창조되었다는 어떤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옷이란 부활의 몸에 대한 기대입니다. 옷을 입는 행위는, 우리가 이생에서 언뜻 볼 수 있을 뿐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더 나은 것’, 한층 더 풍성한 존재가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지란 것입니다. 그 표지를 보증하기 위해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물이 앞으로 올 새로운 생명의 첫 지불금이요 보증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9-11에서 말하듯이, 영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방편이었습니다. 또한 영은 하나님의 양자인(3:26) 우리에게도 동일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부활 희망을 이해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사도로서 그의 현재 사역이 죽음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성령을 통해 확실한 부활 희망도 동반하고 있음을 그들이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고린도 교인들이 이것을 깨닫는다면, 그들은 바울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자아를 완전히 새로운 빛에서 이해하는 법을 터득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성령을 통해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