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8. 11:33ㆍ데살로니가강해/고린도후서강해
바울은 고린도를 잠시 방문했는데, 아마도 긴 육로가 아닌 짧은 해로를 갔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짐작합니다. 바울은 첫 번째 편지에서 썼던 문제 가운데 몇 가지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가 그를 반갑게 맞이하여 사태를 수습하는 데 협조하기는커녕, 반대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개입을 분개했습니다. 바울이 떠난 뒤 고린도에 온 교사들 가운데 일부는 그의 설교 방식, 그의 변변찮은 외모를 조롱했던 것입니다. 고린도가 자부했던 문화적 기준과 기독교 복음이 낳은 낯선 신세계 사이의 긴장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계는 흐트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고린도 교회와 바울 자신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여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새롭게 착수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내용입니다.
1:23-24, “내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잠시 방문하고 깊은 고뇌를 안고 에베소로 돌아와서 눈물의 편지를 적었던 것입니다. 그 편지는 지금 보존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정확하게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무엇을 희망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 편지가 효력을 발휘해서, 가지가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와 행동한 것이지, 그들을 개인 소유물처럼 다루거나, 그들을 부리거나, 그럴 요령으로 그들을 속상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음을 그들이 헤아리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아무 결실도 거두지 못했거나 도리어 없느니만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 그 편지가 보존되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상황을 개선하려고 애쓰다가 도리어 악화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사이 에베소에서는 바울에게 고난이 닥쳤던 것입니다. 에베소에서는 고난이, 바다 건너 고린도에서는 반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더없이 깊고 캄캄한 절망의 나락에 가라앉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는 다시 그들에게 전갈을 보내, 자기가 곧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위함이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1-2,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지금까지 바울은 고린도를 두 번 방문하였는데, 처음에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함이었고(행 18:1-18) 두 번째는 거짓 교사들로 말미암아 생긴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12:14, 13:2). 바울은 디모데의 보고를 듣고 서둘러 고린도를 방문했지만 멸시와 냉대를 받고 가슴 아픈 상처만을 안고 다시 에베소로 되돌아왔던 것입니다(13:2). 그래서 바울은 근심하면서 고린도로가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여행 계획을 바꾸고 그 대신 눈물의 편지를 써 보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란 구절은 고린도 중간 방문설의 근거가 되는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 전서에는 가슴 아픈 방문에 대한 암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2:3-4,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바울은 두 번째 고린도 방문 결과가 좋지 못해서 교인들과의 관계가 더욱 나빠지게 되자 큰 고통과 괴로운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의 편지를 쓰거나 눈물로 호소했는데(빌 3:18, 행 19:19), 당시 눈물을 흘리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스토아 철학자들과는 정반대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는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실제로 사람들을 조롱하고, 사람들의 유익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만든다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 또한 똑같은 수법을 쓰려고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 전체에서 바울의 주된 논점은, 이것이 그가 갖고 있거나 혹은 갖고 싶어 하는 권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좌지우지 하는 오만한 군주와 주인처럼 행세할 속셈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닌 믿음이 그들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굳건히 세우는 것이 바울이 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간섭하거나 그들과 주님 사이에 개입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을 위해 일하는 주님의 종으로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의 사랑과 충성, 더 나아가 그들의 기쁨까지 배가시킬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 공동체에서 중요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인 것입니다. 바울이 이해하는 고린도 교인들과 자신의 관계에는 사랑과 슬픔이 진하게 뒤엉켜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은, 권력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들을 사랑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나에게는 누구와 사랑과 슬픔과 기쁨이 뒤엉켜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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