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후서강해]#5. 2:5-11. "용서하라"

2024. 5. 9. 12:38데살로니가강해/고린도후서강해

 

용서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 훈련인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야 할 일이란, 다른 사람들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나쁜 일입니다. 우리가 그 일에 집착하면, 우리는 반복해서 그 일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그 기억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우리의 삶을 해롭게 하는 영향력을 다른 사람에게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을 흘러 보내는 법을 터득하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이처럼 용서란 양방향 통행로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죄책감에서 놓아줌으로써, 그들의 행동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지는 위험에서 놓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용서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2:5-6,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삶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본문에서 말하는 근심하게 한 자가 음행을 한 자였는지 아니면 바울을 대적한 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처벌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함으로써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을 근심하게 한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어느 정도라고 말한 것은 잘못을 한 자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교인 한 사람의 죄는 교인 전체가 져야 할 짐이며 따라서 교인 전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7-9,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아마도 문제의 당사자는 고린도전서 5:1-5에서 바울이 비난했던 사람, 곧 친부의 처와 동거했던 남자와 동일 인물일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그 남자를 그리스도인 공동체 밖으로 내쫓고, 은혜의 범위 바깥 어둠의 세계로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아마 고린도 교회가 처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징계를 거부하고, 바울이 가슴 아픈 짧은 방문을 했을 때 그에게 맞섰지만, 그 뒤에 결국 앞에서 바울이 언급한 가슴 아픈 편지에 따라 바울의 의견을 수렴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어떤 호소에 응답하여, 고린도 교회가 정말 누군가에게 중징계를 내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징계가 너무 과중해서, 이제 그들이 다음 단계, 곧 화해와 용서의 단계로 넘어가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깨달아야 할 점은, 공동체의 결속력이 강할수록, 한 구성원에게 일어나는 일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이 슬퍼하면, 그들 모두가 분위가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한 사람이 아무런 제재 없이 죄를 계속 범하도록 허용을 한다면, 공동체 전체가 진흙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가 순간을 모면하기보다 장기적인 것을 염두에 두고 고민할 때 다음 두 가지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완강한 죄인과 직면하여 징계하고, 그런 다음 그로 인해 야기된 슬픔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본문이 이 편지의 핵심 주제입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든지 메시아 앞에서한 것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용서 또한 예수님 앞에서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야만 그 용서를 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들은 용서를 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또한 본문에서 자기가 용서를 했지만 그가 누군지 무슨 용서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망증이 아닙니다. 엄격한 영적 훈련의 한 부분입니다. 즉 바울은 용서함과 동시에 잊어버린 것입니다. 용서하라. 그리고 잊어라. 물론, 징계가 수박 겉핥기 수준에 머물러 범죄자가 이내 똑같은 습성으로 돌아간다면, 더 엄격한 징계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사태의 진행에 따라 지혜와 사랑이 늘 정밀한 조율 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이것은 단순히 질서와 정돈을 위해 교회 생활을 바로잡는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훨씬 더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발자 사탄과 맞서는 교회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우리는 사탄이 짜고 있는 교활한 계략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사탄의 수법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 처신과 징계에 관한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이 공동체 안에서, 또 특히 이 공동체를 통해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느냐는 더 큰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관심이 단지 잔잔한 삶을 누리는 데에만 쏠려 있고, 그것을 위해 분명하고 뚜렷한 복음의 신앙과 행동을 희석 시킨다면, 공동체의 실효성, 곧 세상을 향한 공동체의 증언과 선교는 심각하게 위축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기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징계와 질서 유지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범죄자를 엄격하게 다루되, 그들이 회개하고 교정되어 온전한 구성원으로 다시 환영받을 기회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똑같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 정도 그 둘 사이를 잘 조절하여 중용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란 배는 그냥 제자리만 맴돌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사태는 더 악화가 되어 사탄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 중도의 길을 걷기 위해 우리는 모든 일을 메시아 예수 앞에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나의 모든 삶을 예수님 앞에서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