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데살로니가강해]#2. 살전 1:6-10. "믿는 자의 본이 되다"

2024. 4. 1. 12:05데살로니가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을 굳게 지킨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 신들은 어디에나 깃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당신이 나무 한 그루를 심으려고 한다면 해당 신에게 기도해야 하며, 사업상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면 서둘러 적당한 사원을 방문하는 것이 순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결혼을 한다면, 해당 신에게 엄숙하고도 값비싼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었습니다. 모든 길의 길목마다 신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신들은 예측 불가능하고, 악의를 품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이기 때문에,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그들을 달래서 자기편으로 만들어 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일행을 통해 세상에는 한 분이신 참 하나님만 계시고 이 참 하나님에게는 참 아들이 한 분 있는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들 사이에서 일으켜 이 사실을 입증하셨다는 것을 전해 듣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동차와 컴퓨터와 스마트폰 사용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져야 할 위험 부담을 알면서도 우상에게서 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섰고 고난과 기쁨을 동시에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한 방향으로 가다가 멈추고 돌아서서 다른 방향으로 갈 때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바울은 회심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시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선포했을 뿐입니다. 다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내면에서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의 역사함이란 것입니다.

 1:7-8,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바울을 본받은 자들은 이제는 본보기가 되었는데, 이것은 복음이 일으킨 즉각적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우상이 아닌 참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이런 메시지는 그 당시 세계에서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떻게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본이 되었는가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 시작하여 널리 퍼졌다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행동적인 삶과 증거 그 자체로 인해 소문이 퍼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에 대해 자랑한 바 있습니다(고후 8:1-5). 그러나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그들에 대해 자랑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훌륭한 소문이 널리 펴져나갔다는 것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9-10,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위시한 각처의 교인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회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헬라계 이방인으로 헬라의 다신교적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참 하나님에 대한 복음을 듣고 이제는 이전의 모든 생활, 즉 우상 숭배 등에서 돌이켜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몸소 회개한 성도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도 그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삶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다른 지역까지 복음이 선포되었을까?

 또한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의 중요한 교리들이 제시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둘러싼 종말의 사건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도에서 역설한 바 있거니와(행 17:3), 그들은 이를 그들의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행 2:24, 13:30). 사실 초대 교회에서 언제나 강조하였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변증이다”라고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본서와 데살로니가후서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바울은 재림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경계하였으나(살후 3:10-11) 재림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재림의 때는 아버지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하나(마 24:36) 분명한 것은 이때 성도의 구원은 완성되고 불신자는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장차 엄청난 비탄의 시기가 올 것인데, 그때는 ‘진노’나 ‘맹렬한 분노’ 같은 단어만이 어울리는 때가 될 것입니다. ‘진노’나 ‘맹렬한 분노’는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 자신의 세상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모든 대상에게 쏟으시는 이상하고 어두운 반응입니다. 이런 진노의 때가 분명히 오겠지만,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친히 진노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이것이 1세기 기독교의 희망의 중심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중심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은 얼마 전에 신자가 되었던 자들입니다. 그 기간은 기껏해야 1년도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백 킬로미터 반경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예수님의 복음 메시지를 통해 역사하셨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원동력은 바로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회개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