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디모데전서강해]#11. 4:6-10.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

2024. 12. 26. 11:36목회서신강해

 

 

오늘 본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될 것을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디모데를 계속 격려하는 것은 그가 거짓 교사들 가운데서 얼마나 힘겹게 목회하고 있었는지를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디모데에게 바울은 훌륭한 일꾼의 자세와 목회자의 공적 임무에 대해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영성‘은 그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다는 느낌이며, 그분의 사랑에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이며, 일상생활의 여러 일 가운데서 초월적인 영역을 감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영성이란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무엇이라는 것, 즉 운동선수들의 훈련처럼 열심히해야 하는 무엇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지혜로운 안내자들이 그런 훈련들을 개발했지만 바울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훈련을 염두에 두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자신이 열심히 수고하며 분투하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여기서 분투라는 단어는 레슬링 선수들이 자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기도, 목회적 돌봄, 전도의 일들을 수월하고 쉬운 과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런 것으로 여기지 않고, 부지런한 일꾼이 엉겅퀴와 쐐기풀이 무성한 땅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꾸어 놓듯 주변 세상을 변화시기는 그런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4:6-7,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깨우치면“이란 말의 의미는 어떤 지식을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진리의 말씀을 기억시키고 성경적인 올바른 교훈을 제시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 깨우침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일꾼이 되어 마치 늙은 노파들이 어린이에게 들려주려고 신화 이야기를 허황되게 꾸며 말하는 것처럼 당시 이단들이 주장하는 끝없는 족보와 신화(딤전(딤저 1:4)의 이야기를 잘 분별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족보와 허탄한 이야기를 놓고 끝없는 논쟁과 토론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에 반대되는 무익하고 거짓된 가르침이기 때문에 단호히 물리쳐야만 한다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그저 가끔 종교적인인 삶을 살고, 나머지 삶은 주변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국적이고 흥분되고 비밀스러워 보이는 종교적 가르침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소 이상한 새로운 개념을 가진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손사래를 치면서 묵살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상한 신화들, 사람들이 떠들어 대기 좋아하는 그런 것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피해야 한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본절은 신약성경에서 운동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언급하는 곳 중 하나라고 합니다.. 앞 단락에서처럼 여기서도 고린도전서의 내용이 반복되는데, 이번에는 9:24-27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육상, 레슬링, 달리기, 경주, 권투 등 당시 세계에서 익숙하던 스포츠를 언급합니다. 디모데가 그런 것들에 활발하게 관여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다만 효과적인 실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점은 명백합니다. 참된 신앙, 진정한 경건을 위해서는 운동선수가 하는 만큼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훈련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훈련은 체력을 단련시켜 보다 열심히 일하고 인생을 즐길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하지만 경건의 훈련은 단지 영성만 단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사람, 자제하는 사람, 온전한 인간으로 제대로 성장해야 하는 줄을 알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생명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패의 권세는 너무도 강해서, 생명 즉 하나님이 그분의 온 창조 세계에 주고 싶어 하시는 새 생명이 이기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지도 아래 영적 훈련을 분투하며 씨름하는 이들은, 새로운 세상의 궁극적인 생명에 이르기 위해, 현재 우리에게 미리 나타난 그 생명을 고대하며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이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 더 면밀하게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9-10,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세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모든 사람이 완전하고 궁극적인 의미에서 구원받을것이지만, 현재 이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구원을 누리므로 그러지 못한 이들보다 더 온전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바울이 마지막 때에 일부는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고 자주 경고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하나님이 원칙상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의 구원자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구원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분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구원받는 사람들은 오직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바울의 세상에서 구원자라는 단어가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영예로운 호칭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바울은 그 단어를 여기서는 하나님을, 디모데후서 1:10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사용함으로써, 이 하나님 그리고 이 예수님이 참 ’구원자‘시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을 통해 온 세상이 부패와 불의에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란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 전체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형편이 더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최후의 제안을 거부할 권리와 존엄성이 있으므로 오로지 믿는 사람들만이 이 구원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돌보는 일의 핵심이라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알려 주고 진리를 먹이는 것, 이런 이상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실제로 복음 안에서 부름 받은 삶임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명쾌하고 건전한 방식으로 펼쳐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복음안에서 부름 받은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