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로마서강해]#36. 8:18-25. "영화를 향하여"

2023. 11. 14. 21:19로마서강해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와 표적은 영화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 점에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중단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용서함 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초에 불과한 것이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화도 끝이 아닙니다. ‘영화’가 끝입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들에게 이 위대한 주제를 소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영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영화는 죄와 악의 모은 영향과 국면에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과 영과 영혼이 다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이고 완전한 사람, 평화롭게 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화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에 대한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까지 이어온 편지의 절정인 8장 가운데서도 절정인 내용입니다.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들은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만사형통하고 죽어서는 천당에 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굉장한 고난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또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다면 우리는 ‘그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더 이상의 환난이나 어려움이나 고난이나, 그러한 것들이 없을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전체 삶이 더 쉬워질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바울은 “힘을 내시오 얼마 있으면 곧 좋아집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실제적으로 고난을 그대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더 이상 그것을 참아낼 수 없이 무섭다고 느껴질 때, 다른 쪽을 보라는 것입니다. 나타날 영광을 보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에 대처하는 기독교 방식의 위안이라는 것입니다.

 8:19-23,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 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니라” 이사야서 35장에서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이사야는 피조세계를 의인화 했습니다. 앞 절에서 이야기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너무나도 커서 모든 피조물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그것을 갈망하며 그것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피조물의 운명이 사람의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죄가 피조물이 현재 놓여 있는 상태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조물 또한 원래 의도된 대로의 기능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요점은 그것이 영광스럽고 주권적인 다스림, 곧 온 세계에 대한 메시아의 구원의 다스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 창조 세계가 고대하는 것입니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에 대한 성경의 큰 이야기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 세계의 현재 모습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처한 상황과 같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 내려가도록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을 데리고 나오시면서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된 백성으로 영원히 규정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창조 세계가 여름과 겨울, 성장과 부패, 생성과 소멸이라는 현재의 순환에 굴복하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세계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한 창조이며 그분의 권능과 영광을 담고 있지만(1:20), 세계의 현재 모습은 온전한 모습이 아님을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언제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통해 언젠가는 온 세계를 바로잡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것입니다.

 인류는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을 맡았습니다. 사람이 반역하고 하나님 대신 창조 세계를 경배했을 때(1:21-23), 창조 세계는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종노릇 상태가 지속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 세계가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계를 원래 계획대로 바로잡으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계획은 창조주를 경배하고 세계에 대한 영광스러운 청지기직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자녀가 영화롭게 될 때 놀라운 혜택을 입기를 고대한다는 것입니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게 영광 곧 지혜로운 통치와 청지기직을 주실 때 특별한 해방을 누리기를 실제로 학수고대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앞으로 우리들에게 있을 영광을 생각하라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바울은 “만일 너희가 이 원리, 곧 너희가 소망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원리를 안다면 현재에는 보지 못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 원리를 포착한다면 그것을 참음으로 기다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자세는 본질적으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영광을 향하여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소망’으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소망을 가지지 않았다면 고난을 참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은 고난을 받지만 우리가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구속을 받을 때, 곧 우리에게 약속한 부활의 몸을 받을 때를 갈망하고 고대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아주 인상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믿음과 같이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볼 수 있다면 희망이 아닐 것이다) 확실한 희망이라고 간절히 인내하면서 신음하며 기다리는 것을 기독교적 태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기를 갈망하면서 진통 중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그런 고통과 희망을 나누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계의 고통에서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면서 세계가 고통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소명, 곧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속한 우리의 고귀하면서도 기이한 역할의 일부인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과연 새로운 창조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 세계에서 청지기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