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로마서강해]#39. 9:1-5. "하나님의 양자됨"

2023. 11. 17. 11:29로마서강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결합하기 어려운 두 가지를 결합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유대인을 참으로 택하셨고, 그들을 세상을 위한 자기 백성으로 준비시켰다는 사실을 강력히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나사렛 예수가 과거나 현재나 참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사실도 강력히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독특한 부르심을 믿지 않는다면, 메시아를 믿는 것의 의미를 완전히 놓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였다고 믿는데, 동료 유대인 대부분이 그러한 믿음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바울로 하여금 정신적, 정서적으로 굉장히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바울의 슬픔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혈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심정을 설명하는 말을 보면 깊은 슬픔에 빠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그중에서도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강경파인 샴마이 학파였습니다. 그런 그가 동료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민족의 반역자로 취급함에 그의 마음이 복잡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로마는 그 당시 다른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가장 악한 타입의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종이 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세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국노로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멸시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와 유사한 유의 비난을 바울에게 퍼부어 대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돈을 바라고 그러한 일을 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종교가 유대교를 말살시키고 로마의 상전들과 이방인들에게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변심하여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천성적으로 열렬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자기가 유대인이요 이 은총 입은 종족에 속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기서 자기 동족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해야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1-35)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칼처럼 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마저 나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형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둘 사이에 큰 간격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는 두 종류의 형제들을 가진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때에는 그에게 한 종류의 형제들만 있었지만 즉 그가 속한 민족, 그가 속한 족속이 바로 그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골육의 친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옛 관계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구원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구속받지 못한 자들의 운명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동료 유대인들에게 향한 마음에 슬픔이 묻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본문을 보면서 우리 가족 중에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는지를~그것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이 슬픔으로 이어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들이 어떤 것을 진정으로 누리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들에게 큰 유익을 준다면 그것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심우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에게 “어째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하고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복음을 전하는 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오지 않았는가? 아니면 내가 ‘거듭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서일까? 하고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9:4-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본문에서는 바울이 마음의 슬픔이 어째서 일어났는지 그 상세한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처럼 슬픈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왜 유대인이나 히브리인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했을까? 이스라엘은 창세기 32:26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난 후에 얻은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은 야곱의 후손들이라는 말입니다. 즉, 그의 후손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 이름이 주어진 것입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 이 말씀은 부단하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된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으므로 따라오는 결과물들이, 양자 됨과, 그들이 영광을 받게 된 것과, 언약을 받게 되고, 율법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메시아에게 속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입양아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소망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약속은 메시아 안에서 성취되었고, 이제 정당하게 그들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이 행하셨으므로,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은 이제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을 상속받은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의 백성으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받는 영광을 같은 동료 유대인들이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바울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서신 초두에서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의 인격 속에 신성과 인성이 있음을 우리들에게 알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의 혈육 또는 친지나 친구들 때문에 슬퍼한 적이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