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1. 17:58ㆍ마가복음강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주류적 사고와 생활방식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고, 예수님의 관점보다는 자신들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쓰며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신의 소명을 걸고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행하시는데, 그들이 그것을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한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생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각이 옳다면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과의 생각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립은 끝까지 계속되며 예수님의 십자가형에서 그 절정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11-12,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유대인들은 늘 예언자나 지도자들에게 표적을 구하였다고 합니다(마 12:38-40, 고전 1:22). 지금까지 그들은 여러 기적들을 보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거나 메시아라는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늘로부터 오는 더 큰 표적들, 즉 모세의 만나(출 16:4), 여호수아가 해와 달을 멈춘 일(수 10:12-14)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을 이 세대에게는 표적을 주지 않을 것이라며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을 가셨습니다(13절).
8:14-15,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유대인들은 평상시 빵을 만들 때는 누룩을 사용했지만, 유월절에는 누룩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서둘러 떠나야 했기에 누룩 없는 빵밖에는 만들 시간이 없었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누룩’을 언급하시는 이유는 잘못된 빵을 잘 구분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흐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염두에 두신 더 광범위한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아주 엄격하게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유대인들을 위한 나라를 하나님이 세워 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헤롯의 누룩은 무엇일까? 마태복음에서는(16:5-6)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 중에는 세속적 정치 세력인 헤롯 당원이 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두개인들은 현세주의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헤롯의 누룩은 헤롯 왕가를 진정한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관점 모두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는 그 두 관점을 따라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예수님의 관점은 매우 달았는데, 그분이 무리를 먹이신 특이한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원 모습을 보여 주는 표적인 동시에 제자들에게 지금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8:16-18,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빨리 이해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세력들이 점점 그 강도를 더해왔고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실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왜 그렇게 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는 사명이 아니라, 그 제도의 핵심을 공격하는 사명을 가지고 그들이 다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치료자가 아니라, 그냥 예언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존재임을, 즉 바리새인들과 심지어 왕족 헤롯마저도 두 번째 자리로 물러나게 하는 존재임을 제자들은 깨달아야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 수 있고, 가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눈에 보이는 빵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예수님은 예언자 에레미아를 인용하십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 지어다”(렘 5:21). 예수님의 인용은 단순히 “너희들이 얼마나 눈이 멀었는지 믿기 힘들 정도다”라는 말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예레미야 시절의 이스라엘과 같은 길을 갈 위험에 처해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때의 문제가 바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문제라고 보셨던 것과 매우 흡사한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자기 문제만 신경 쓰고 사회의 불의와 악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아서 하나님이 그들을 이방인의 손에 내버려 두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면, 그 다른 신들과 그 신들을 섬기는 열성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하셨던 경고의 핵심인 것입니다.
8:19-21,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본문에서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사건과 제자들이 깨달아야 할 내용에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는 15절에서 행한 예수님의 교훈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경계하라는 말은 그들의 떡을 경계하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떡은 실제적으로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을 주고 참된 풍요를 제공해 주는 총체적 인간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물질적인 떡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육적인 해방과 함께 7 광주리, 또는 12 광주리의 떡만큼이나 넉넉한 영적 풍요함을 준다는 암시적 메시지를 읽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바람을 무색게 할 정도로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과 그 반대세력의 사명이 충돌하는 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사태를 이해하기를 애타께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들이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고, 그것을 믿음과 희망의 기초로 삼기 시작했다면 지금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우리 인생과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우리는 이해하고 있는가? 또한 오늘날 예수님을 “깊이 탄식하시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 시간 예수님은 나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를 묻고 계시는지를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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