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100. 23:34-39. "예루살렘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2022. 12. 19. 12:17마태복음강해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대변하는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출 19:5-6). 즉 모든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될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된 것은 민족들의 빛이 되기 위해서입니다(사 4:26, 49:6).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소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다시 한 번 충격적인 예언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주의 종의 모습으로 모든 사람의 죄와 죄책을 몸소 짊어질 거라고 했습니다. 온 세상의 어둠이 이스라엘에 임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 어둠이 해결되고 이 세상에 결국에는 빛이 있을 것이다(이사야 52:13-53:12)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받은 소명이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이스라엘은 그들의 사명을 다 하지 못하고 세상을 따라가기 바빴던 것입니다. 이것을 경고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거절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피를 흘린 죄책을 아벨의 죽음으로까지 추적해 올라가십니다.

 23:35-36,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아벨은 창세기 4장에서 자기 형 가인의 손에 죽은, 살인 사건의 첫 희생자입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사가랴의 피는 역대하 24:20-22에 나오는 살인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모든 일의 책임이 한 세대 위에 책임을 묻는다는 것일까? 마태는 지금 예수님의 소명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성경적으로 풀이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하신 일 들과 그리고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건을 본 복음서 저자들은 구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지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상을 숭배하고, 파괴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그 창조주를 노하시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라고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 전체가 불장난을 했고, 이제는 그 불이 통제를 벗어나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미 닭으로써 그 새끼를 자기 날개 아래 모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23:37-3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어미 닭이 불 앞에서 새끼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자기 날개 아래로 새끼들을 모아들인 사례는 실제적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불이 잡히고 난 후 죽은 어미 닭의 날개를 들춰 보면 병아리들이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거절의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무게는 “성전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계속 죄를 지으면 그 성전에서 떠나실 것이고 성전은 황폐해져 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거라고 경고하는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즉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마태복음을 읽는 첫 독자들은 1차 유대전쟁을 겪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거나 전해 들은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고 본문을 읽으면 초대 교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입니다. 즉 초대교회 교인들은 지금 마태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본문에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란 말은 “환영합니다”라는 히브리어식 표현으로 오늘날에도 쓰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요점은 무엇일까? 앞으로 예수님이 하실 일들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을 알고서 21:9에서 불렀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그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찬송을 불렀던 그 무리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달랐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을 하도록 요구하고 방관을 했던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관심사와 맞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과연 예수님을 환영할 수 있겠는가? 이 시간 나는 예수님을 맞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한 번 진지하게 점검을 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