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98. 23:13-22. "서기관 과 바리새인에 대한 정죄"

2022. 12. 15. 11:13마태복음강해

 

사람들은 맹세에 대한 약속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 “성경을 두고 맹세한다”,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는 등 우리들은 많은 문구를 사용하여 맹세를 하곤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하는 말이 그 자체로 충분히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우리가 하는 말에 힘을 싣기 위해서일까? 우리가 심리적 불안의 표시 건, 진지한 생각 없이 손쉽게 화려한 말을 하려는 의도건, 일단 시작되면 습관이 되고 자신도 무의식 중에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2:3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또한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말 것”을 경고하십니다(22절). 그러면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두고 맹세를 했다는 말입니다. 이 맹세는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되는 맹세인 것인데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금지하셔도 지옥을 두고 맹세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우리가 둘 다 하지 않기를 바라셨을 것이고, 맹세에 대해서 말하는 산상수훈의 요점도 바로 그것입니다(5:33-37).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보다 더 한 차원 깊이 들어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맹세는 유효하고 어떤 맹세는 유효하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데서 나타난 성전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우리는 우선 1차 유대 전쟁이후 이스라엘을 누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가는지를 알아보면 오늘날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율법적인 문화가 형성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차 유대전쟁 이전에는 유대교에는 많은 분파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먼저 제사장 계급이고 귀족 출신의 상류층 계급, 즉 사두개인들은 유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외국으로 피신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심당원들처럼 무력으로 혁명을 꾀하고자 하는 무리들은 끝까지 마사다 요새에서 저항하다. 최후를 맞이 했다고 합니다. 엔세네파 또한 광야에서 로마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럼 남은 분파가 바리새파와 예수를 따른 나사렛파 뿐인 것입니다. 이 또한 1차 유대교 공의회인 얌마 공동의회에서(약 100 년경)에 더 이상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회당에 출입을 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사회를 지탱하는 지도자들은 바리새파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유대교가 율법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그들의 복잡한 율법체계는 율법의 진정한 목적과는 아무 상과도 없는 자잘한 것들에 삶을 허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찾고 하나님을 찾는 진지한 구도자들도 길을 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에 관심을 보이는 비유대교인들이 온갖 노력을 다한 끝에 찾으면, 그들에게 너무도 큰 짐을 지워 애초에 유대교에 대해 알지 못했던 때보다도 더 안 좋은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고 예수님은 경고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3: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예수님은 그들이 거꾸로 알고 있다는 점을 책망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금을, 즉 제단보다도 제물을 더 가치 있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보다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가지고 오는 물건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제단에 가지고 오는 금과 제물이 의미가 있는 것은 성전과 제단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전과 제단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세 번째 계명을 어기는 죄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이 유효하고 유효하지 않은지에 대해 교묘하게 논쟁하면서 그것을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법규와 규칙이 주후 70년 1차 유대 전쟁이후 랍비들에 의해 발전되었고, 그들이 유대교 내에서 지배 세력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판은 일차적으로 당시에 이스라엘을 잘못 인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때가 이르러 이스라엘의 참 메시아가 온 그 순간에도 엉뚱한 방향을 보게 만든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마태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들을 책망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진정한 지도자가 아님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서가 쓰인 시기는 1차 유대 전쟁이 끝나고 난 후란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즉 마태복음서를 읽는 첫 독자들은 1차 유대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더 이상 유대 사회를 이끌어 가는 무리들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마태는 강력하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회는 누가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일까? 바로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이란 것을 마태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첫 독자들은 얼마나 힘이 나고 용기가 났을까!

 우리는 맹인이 길을 인도하면 같이 웅덩이에 빠진다고 하신 예수님을 말씀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가 혹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못 알고 해석하고 있지나 않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오시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를 상상하면서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 좋을 것입니다. 나는 혹시 맹인은 아닐까 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자신을 비추어 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