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2. 15:59ㆍ마태복음강해
사 사두개파들이 예수님과의 부활 논쟁 이후 곧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퍼붓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에게 꼬투리를 잡으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더 잘 지키게 하기 위해서 큰 계명과 작은 계명을 나누어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큰 계명을 지키면 가산점을 준다든지 해서 중요한 계명을 더 잘 지키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의 신앙은 더욱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 신앙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율법사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도대체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2:36-39,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율법학자는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613개의 계명 중 무엇이 가장 큰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 당시 그리고 오늘도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날마다 드리는 기도문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질문을 한 율법학자나 그곳에 있었던 바리새인들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는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가지 계명을 추가하십니다. 바로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실제로 그 계명을 잘 지켰을까? 이미 15장에서 예수님은 올바른 말과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이 주는 메시지는 외적 행동이 올바른 기준에 부합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우리 안에는 아직도 많은 어두움과 불순함이 마음 깊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즉 이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새 생명의 메시지를 가지고 부활하시는 예수님이라는 복음의 더 큰 그림 속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들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계명을 우리 힘으로 순종해야 하는 명령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초대와 약속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삶에서는 증오와 교만이 차즘 없어지고 사랑이 실제로 자리 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도리어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적에 대해 군사적 승리를 거둘 왕이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그 말을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 43-45,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태 또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1:1, 20:30). 그런데 그런 군사적의 힘을 가진 왕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인데, 그런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스라엘만을 위한 군사적 승리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는 무엇을 본문에서 말하고 싶은 것일까? 마태는 1:23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셨다면, 그리고 본문 말씀에서 다윗의 자손이 또한 다윗의 주이기도 하다면, 유대인 대중의 상상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전쟁을 벌이는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통치를 이 세상에 가져올 메시아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편 110편에서 인용한 본문 구절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특정한 인종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이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대결하는 적이 아니라, 인류 전체와 세상 전체의 궁극적 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죄와 죄로 인한 죽음이 바로 그 적이라고 마태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려고 오신 메시아라고 마태는 지금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사람과 이웃 사랑”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모토로 사용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에서 하나님 사랑이 먼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웃 사랑은 저절로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지를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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