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빌립보서강해]#10. 2:25-30. "에바브로디도"

2024. 3. 19. 17:15빌립보서강해

 

오늘 본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앞 절에서 디모데에 대한 단락과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이 짧은 단락은 바울과 그의 사역에서 감정과 정서를 제대로 보여 주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바울의 글은 전부 딱딱하고 압축적이며 추상적인 신학이었다면,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추측만 할 뿐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그가 평소 서신서에 말해왔듯이 즐겁게 주님의 일을 하고 세상에서 걱정 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순수한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삶, 스트레스나 긴장이 없는 삶을 생각할 것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의 4장에서,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은 평화를 알아야 한다고 말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 모든 것을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즉 그 기쁨이 정말 어떤 것인지, 또 기쁨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에바브로디도의 여행, 사명, 죽을 뻔했던 질병 등에 대해 알려줄 뿐 아니라 바울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되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정말 기뻤고,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너무 두려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것을 돕는 자라”에바브로디도의 이름의 뜻은 “풍채가 좋은, 사랑스러운”이며 단축형은 에바브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골로세서 1:7, 4:12, 몬 1:23에서 언급된 인물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출신인 반면에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출신이며 본서를 빌립보 교회에 전한 인물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를 떠난 후에 빌립보 교회를 맡아서 목회하던 하나님의 종 이었습니다. 그는 본문에 나타난 대로 바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일찍부터 바울에게 발탁되어서 그를 따라다니면서 돕다가 사도 바울의 명에 의해서 빌립보에 남아서 목회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감옥 뒷바라지를 하다가 자기 자신이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26-27,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 알고 심히 근심하지라 그가 벙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만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자신도 불쌍히 여기셔서 또 다른 슬픔을 겪지 않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슬픔을 내려놓고 그냥 기뻐하실 수 없나요? 또 에바브로디도가 만약에 병에 걸려 죽었다면 당신은 슬픔 위에 슬픔이 더해져 어쩔 줄 몰라하셨을 것 같은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나요? 그가 주님과 함께 있게 되었으니 기뻐하셔야 하지 않나요?”라고

 바울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기쁩니다.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의 권세를 누르고 승리하셨다는 것과, 언젠가 세상을 그분의 사랑과 정의로 가득 채우시고 최종적인 그분의 나라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이 사실에 의지해서 살아가며, 날마다 이 사실을 경축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친구를 사랑합니다. 특별히 복음을 증언하고 기도하며 내 옆에서 일하고 싸운 이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진짜 애정과 사랑의 띠로 묶여 있었습니다”라고, 우리는 2:1에서 바울이 메시아 안에서 그분의 ‘가족’으로 묶여 있다고 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28-29,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바울은 본문에서 기독교인으로서 그가 느끼는 기쁨에 대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스토아학파처럼 인간의 감정이 어리석은 표면의 잡음이며, 그 아래에서 안정되고 고요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주장하는 ‘기쁨’이 아닌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기쁨은 소망이 같이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 기쁨은 지금 보좌에 계신 주 예수님과 함께할 때에만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에게 인간의 감정이 없는 척한다면, 인간의 감정이 필요 없는 척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의 일부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의 후반부에서 내내 들리는 기뻐하라는 요청은 일상생활의 수많은 인간적 영역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겸손한 순종의 길에는 친구의 무덤가에서(요 11:35), 그리고 겟세마네에서(히 5:7) 흘리신 고뇌의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본문에서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보면 그도 디모데처럼 2:1-11에서 제시한 길을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역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왕이신 주 예수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역자들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에바브로디도처럼 나의 인생을 예수님에게 올인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