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67. 20:13-27.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

2022. 8. 2. 21:16사도행전강해

 

오늘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에베소 장로들을 에베소에서 약 60km 떨어진 밀레도로 오게 하여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한 연설은 이때까지 바울이 한 연설들, 즉 13장, 14장, 17장의 연설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이 연설은 복음을 처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 후 교회에 대한 후속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바울이 쓴 편지에 가깝습니다.

 20:16-17,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바울 일행들은 빌립보에서 유월절을 보냈고(6절), 그 후로 벌써 약 2주가 흘렀습니다. 이제 오순절이 약 30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밀레도에서 만납니다. 아마도 에베소로 들어가면 적들이 그를 공격할 수도 있고 또한 예루살렘에 전할 큰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에 있는 도시인데, 바울이 이전에 방문한 적이 없는 곳입니다.

 18절부터는 바울의 고별 설교부분입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장로들을 만난 것은 설교를 하려고 만난 것은 아니라 작별인사를 하려고 만났습니다. 그냥 작별 인사가 아니라, 그 어느 곳보다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에베소에서의 사역과 그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처럼 여기서도 본을 제시하며 장로들에게도 그렇게 사역을 하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결백함을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오늘날에는 고별사에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죄책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일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는 이렇게 자신의 공적인 일을 돌아볼 이유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떠돌이 선생이나 치료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치료하는 대상이나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유익보다는 자신의 생계유지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 사람들이 자신도 그런 사람이었다고 은근히 말하지 않을까 염려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많은 것을 받기도 했습니다. 20:20-21,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본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등 바울의 서신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천막을 만들면서도 두란노 학당에서 그리고 수많은 개인적인 대화를 돌아보며 자신은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메시아 예수에 대한 믿음을 증언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바울이 자신의 깊은 소명에 입각하여 다시는 이 지역으로 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기에(25절) 이 연설은 더욱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면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느 도시를 가던 고난과 투옥이 일상사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따라가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지중해 동쪽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고 로마를 자신의 새로운 기지로 삼아 서쪽에서 일을 벌일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지켜본 에베소 사람들은 24절에서 바울이 한 말이 진실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바울의 생애의 목표는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 곧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부르심을 받았고 삶을 이어갔으며 주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이나 생명도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다른 서신서에서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고후 4:7, 빌 1:20).

 20: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본문은 히브리적 표현으로 피는 생명을 가리키며(마 27:24, 행 18:6), 여기서는 에스겔서 33:1-7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경비를 소홀히 해서 백성에게 화가 미치면 그 피는 파수꾼에게 돌아가지만, 반대로 파수꾼이 경고했는데도 악행을 거듭하면 백성은 죽지만 파수꾼의 생명은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생명의 복음을 충분히 전했으므로 이제 불신앙으로 멸망하는 일이 있게 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전한 생명의 말씀을 잘 믿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생을 경주에 비유했습니다(고전 9:24-27, 갈 2:2). 이처럼 영성은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고 지금 나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는 긴 여정인 것입니다. 불교 영성은 그 긴 여정을 부처에게서 알아가는 과정이고 힌두교 영성은 브라만에게서 알아가는 과정이고 이슬람 영성은 코란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영성은 무엇인가? 바로 성경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긴 여정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영성은 21세기에 가장 핫한 이슈입니다. 서점에 가보면 각종 영성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나는 나의 인생의 긴 여정을 무엇으로 통하여 알아가고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