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71. 21:27-36. "성전에서 일어난 폭동"

2022. 8. 10. 20:51사도행전강해

 

사도 바울이 결례를 칠일 동안 행하는데, 마지막 날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가자. 사도 바울을 본 사람들이 무리를 충동질하는 바람에 결국 결례 행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소동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칼뱅은 사도 바울이 타협안 자체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결례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성령이 말씀하신 대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큰 고난에 처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21:27-28, “그 이레가 거의 차 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은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렵혔다 하니”그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29절)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전도하고 있을 동안 바울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을  유대교의 3대 요소이며 자랑이라고 여기는 3가지를 들어 고소하였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부심을 갖는 백성,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성전 바깥에는 “이방인들의 뜰”이 있었고 안쪽에는 “유대인들의 뜰”이 있었는데, 그 뜰 사이에는 높은 벽이 쳐 있었고 그 벽 사이에는 문이 있었고 이방인은 이 문을 지나서 안 뜰에 들어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으며 어길 때는 사형까지 시킬 수 있었습니다. 로마 당국도 이런 경우에는 유대인들이 사형을 시키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었던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 안으로 데리고 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은 죽일 수 없었겠지만 이방인인 드로비모는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21:30-31,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아마도 오순절 축제 기간 중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무리를 부추겨 배신자를 잡으러 가자고 선동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일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미련한 일이라고 한 자신의 말(고전 1:21-24)이 실현되고 있는 현실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21:32-33,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 경내를 들여다볼 수 있게 지어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은 소동을 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군대의 천부장들은 대개 정치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도 승진 가도에 있는 젊은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귀족일 가능성이 크고 교육도 잘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해도 1세기 유대의 정치와 종교 생활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소요의 당사자인 바울을 결박하고 무슨 일인지 알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소하는 내용이 장황하고 애매하며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태를 파악하기 어려워 그래서 바울을 요새 안으로 데려가려고 했습니다(34절).

 21:35-36,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만일 이때 로마 군인들의 보호가 없었다면 바울은 성난 무리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생명이 구출된 것은 로마 당국의 공평한 판단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유대인은 늘 잘못된 행동을 하는데 로마인들은 옳은 행동을 한다고 로마에 아부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로마에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의 갈리오 사건과 에베소에서 서기관의 경우를 포함해서 하나의 패턴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즉 바울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것이고 냉철한 정의가 성급한 폭도를 제압하면 바울의 정당성은 입증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구출하기 위해 이방인 고레스를 사용하셨습니다(사 45:1). 또한 하나님은 바울이 죽임을 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온갖 결함을 갖고 있는 로마의 사법제도를 사용하실 수 있고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오늘날 복음을 위하여 무엇을 사용하고 계실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늘 깨어서 하나님의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지금 나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