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72. 21:37-22:11. "바울의 간증"

2022. 8. 16. 21:12사도행전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단 한번 자신의 신앙체험을 간증한 내용입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복음의 산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군중들의 난동으로 파묻혀 버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 천부장에 의하여 죄수로 가이샤라로 끌려가게 되고, 나중에는 로마 법정까지 가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21:37-38,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바울이 헬라어를 유창하게 하니 천부장은 놀랐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어느 오지에서 온 그거 그런 건달이거나 사고뭉치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최근에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 사람’ 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 사람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는 일을 포함해 예언자의 표징을 행하다가 사라졌는데, 이제 다시 나타나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잡힌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1: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바울은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이 유대인이고 길리기아에 있는 다소의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다소는 터키 남부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전성기 때는 주민이 약 50만 명이나 살았고 좋은 교육 전통이 있는 나름 자부심을 가질 만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천부장에게 이런 사실을 말한 것은, 그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폭도들에게 얻어맞아서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으나 이번이야말로 그가 다른 많은 곳에서 한 일을 예루살렘에서도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21: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어 말로 말하니라”바울은 고대 히브리어보다는 아람어를 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대 히브리어는 누구나 알아듣는 언어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로마서 9:2-5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 유대인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메시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그는 동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고(롬 10:2)에서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폭도들 앞에서 그렇게나 담대히 간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바울은 자신의 소개로 간증을 시작합니다. 그의 부모는 엄격한 바리새인이었고, 그에게 가장 엄격한 랍비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가말리엘은 5장에서 이미 만났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사도들이 잡혔을 때 하나님을 공격하는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 더 이상 그리스도인을 공격하지 말라는 옹호 발언을 했고, 그 발언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승처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파는 두 가지 학파로 나뉘었습니다. 강경파인 샴마이 학파가 있었고 온건파인 힐렐 파가 있었습니다. 가말리엘은 온건파였는데 바울은 강경파인 샴마이파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조상의 율법과 모세의 법규를 잘 알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품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한 일을 설명합니다.

 22:4-5,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바울은 자신이 한 일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가졌던 확고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통성의 가장 중요한 증거로 자신이 교회를 박해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대제사장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에게 위임받은 사람은 더욱더 드물었을 것입니다.

 22:6-11절까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가지고 바울을 정신분석하려 했습니다. 또한 그가 내적 망상으로 고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바울이 그 망상을 하늘로부터 온 환상이라고 해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심리에서 일어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믿었는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이후의 그의 삶과 그의 신앙이 그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신앙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살아 계셨어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박해자들을 설교자로 변화를 시키십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힐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으로서 존경받는 출생과 배경과 훈련과 열심은 메시아와 마주치는 길로 그를 이끌었고,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임을 그는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본 히퍼 목사가 말한 것이 또 생각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부르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면서 우리들의 야망이나 안락함이나 권력을 꿈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면서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