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81. 25:1-12. "상소하다"

2022. 9. 28. 10:47사도행전강해

시편시편 72:1-3,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우리들은 이런 왕들을 원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정리해 줄 왕, 마침내 불쌍한 사람들에게 권리를 줄 사람, 자신의 통치를 통해 땅이 평화롭고 들에서 수확을 내게 할 사람, 이런 노래가 계속 불리고 희망의 기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왕위가 승계될 때, 분명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같은 기도를 했으나 소용없었고 이전 왕을 위해서도 이 노래를 불렀고 그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그는 우리를 실망시켰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이것은 오늘날 새로운 대통령이나 총리가 선출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59년에 베스도가 부임했을 때 또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새로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가 바울의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베스도는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했습니다(1~2절). 24: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그들이 벨릭스의 재판장에서 바울을 본 것이 2년 전이었지만 베스도에게 가장 먼저 제기하고 싶어 하는 문제가 바로 바울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을 미루어보았을 때 2년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여전히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면 이들이 이렇게나 바울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스도도 이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따라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기서 다시 절차를 밞도록 권합니다.(4~5)

 25:6-7,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내지 못한지라” 베스도가 새로 부임하면 많은 일들을 처리할 것이 많았을 텐데 예루살렘에서 도착한 지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서 바울을 데려오라고 한 것은 베스도 입장에서도 바울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 지도자들과의 사이가 좋아야만 그 또한 총독 생활을 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에 대한 나쁜 청원을 로마 황제에게 한다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년 만에 바울을 본 유대 지도자들은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2년 전보다도 더 많은 혐의를 고발했을 것입니다.

25: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바울은 자신이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에 대해서도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고발한 사람들처럼, 그들이 반유대교적 태도에 대해서만 바울을 고발한 것이 아니라, 반로마적 가르침이나 관습에 대해서도 고발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지도자들은 바울을 예수님처럼 정치범으로 몰아서 십자가에 처형을 하고 싶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스도는 마지막으로 유대인 집권층과 사실상 유대인 전체에게서 상당한 정치적 신용을 얻을 수 있는 일을 시도합니다. 그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자신의 공식 법정인 가이사랴로 내려오게 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자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25: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25: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니이다”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황제의 재판정에, 황제의 위임을 받은 관리 앞에 황제의 제국에 속한 시민으로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무죄를 항변합니다. 자신이 죽을 만한 일을 했다면 죽는 것이 두렵지 않으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결국 베스도가 유대인들에게 바울을 넘겨주는 것이고 그 결과가 어떨지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에서 치안관들에게 공식 사과를 요구했던 것처럼, 제대로 선출된 관리가 제대로 권한 받은 일을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황제에게 상소하는 것입니다(11절).

 25: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본문에서 말하는 ‘상소’는 오늘날의 상소와는 개념이 다릅니다, 이미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판결이 내려지고 형이 선고된 상태에서 상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아직 재판도 받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재판을 제국의 최고 법정에서 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시민으로서 그의 권리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로 갈 것이라고 소명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약속받았고(19:21), 또한 특별한 환상을 통해 예수님께 약속받았다(23:11)는 것을 누가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누가는 우리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일까? 바울이 로마로 가기 위해서는 바울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우리 기도의 상호 작용과 관련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이 행동하시기를 기다릴 때, 하나님이 행동하시기는 하겠지만 그 문제에 대해 우리가 인간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면 그것을 통해 일하시겠다는 것이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일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기도에서 동일한 잣대가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 어떤 것이 적용되는지를 분별하고 깨닫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지도자들이 갖춰야 하는 중요한 분별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안테나는 항상 하나님에게 향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훈련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의 안테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