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2. 11:01ㆍ사도행전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아그립바 2세에게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이 적어도 일반적인 초정통 유대교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유대교를 반대하는 발언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적어도 그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마약을 끊으려고 애쓰는 환자들을 찾아가 말하는 마약 중독 경험자처럼, 바울은 이론이나 일반적인 인도적 관심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읽으면 이해하기가 좋을 것입니다. 26: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습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아그립바는 유대인과 그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고 또 어릴 때부터 로마 궁중에서 자라나면서 로마인의 기질을 닮아 폭이 넓고 이해심도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유대인과 로마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 다음, 자신이 심문받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6:4-5,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바울은 지금 자신이 초정통파이자 초열심과 유대인으로서 최고 수준의 유대교 교육을 받았다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공하는 길은 종교인의 길을 걷는 것이었고 그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의 길은 바리새파 그중에서도 최고는 역시 가마리엘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바울은 탁월했습니다. 이것을 아마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 알았던 것 같습니다. 즉 다소 출신의 누구 아들 사울이라고 하면 예루살렘 사람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으로 보던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왜 이곳에서 심문을 받아야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26:6-7,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바울이 심문을 받는 것은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최근에 유행하는 교리로 보았고 위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류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그것은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그 외 사람들에게 분명히 암시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약속은 어디서 살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붙잡는 약속이고 그들은 예배드릴 때 그것을 간절히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믿고 전하는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예배 생활 자체에 근거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두개인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 중에 부활이라는 말의 언급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고소를 당한 이유는 바로 그 “소망”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6: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본문이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즉 부활 입니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는 특이한 추가적인 교리가 아니고 우리가 기다렸던 것이고 예수님에게서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질문에 대하여 고대의 모든 이방 철학자는 그 점에 대해 단호히 반대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철학자들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스도같은 사람들의 답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을 향해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유대인이 아그립바 2세처럼 세련되고 처세에 능한 국제적 유대인일지라도 유대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본 교리로 믿는 사람들인데 불구하고 부활을 믿지 못하는가를 바울이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아그립바는 사두개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들 중에서 대제사장을 임명하였습니다. 유대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했고 바리새인은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학의 중심에 두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은 자신들이 믿지 않은 부활,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바울이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9~11절에서 자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위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투옥하고 죽였으며 외국까지 그들을 추격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자신에 대한 변론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중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내용들이 충분히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회심’인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이든 우리의 회심이든, 우리는 회심의 의미를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혹은 무종교로 흑백처럼 바꾸는 것으로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열심 있는 유대인으로서 믿었던 것, 그리고 이제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기초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믿음으로 살든 그렇지 않든, 그들의 인생은 사실 창조주 하나님께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회심을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하여 똑바로 안다는 것일까? 왜냐하면 바울 또한 회심하기 전에 어느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에게 열심인 자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심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시간 나는 새로운 피조물 즉 내 안에 성령님이 내재하고 계시는지를 느끼고 있는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아그립바 2세에게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이 적어도 일반적인 초정통 유대교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유대교를 반대하는 발언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적어도 그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마약을 끊으려고 애쓰는 환자들을 찾아가 말하는 마약 중독 경험자처럼, 바울은 이론이나 일반적인 인도적 관심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읽으면 이해하기가 좋을 것입니다.
26: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습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아그립바는 유대인과 그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고 또 어릴 때부터 로마 궁중에서 자라나면서 로마인의 기질을 닮아 폭이 넓고 이해심도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유대인과 로마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 다음, 자신이 심문받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6:4-5,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바울은 지금 자신이 초정통파이자 초열심과 유대인으로서 최고 수준의 유대교 교육을 받았다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공하는 길은 종교인의 길을 걷는 것이었고 그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의 길은 바리새파 그중에서도 최고는 역시 가마리엘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바울은 탁월했습니다. 이것을 아마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 알았던 것 같습니다. 즉 다소 출신의 누구 아들 사울이라고 하면 예루살렘 사람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으로 보던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왜 이곳에서 심문을 받아야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26:6-7,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바울이 심문을 받는 것은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최근에 유행하는 교리로 보았고 위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류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그것은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그 외 사람들에게 분명히 암시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약속은 어디서 살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붙잡는 약속이고 그들은 예배드릴 때 그것을 간절히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믿고 전하는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예배 생활 자체에 근거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두개인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 중에 부활이라는 말의 언급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고소를 당한 이유는 바로 그 “소망”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6: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본문이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즉 부활입니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는 특이한 추가적인 교리가 아니고 우리가 기다렸던 것이고 예수님에게서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질문에 대하여 고대의 모든 이방 철학자는 그 점에 대해 단호히 반대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철학자들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스도 같은 사람들의 답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을 향해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유대인이 아그립바 2세처럼 세련되고 처세에 능한 국제적 유대인일지라도 유대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본 교리로 믿는 사람들인데 불구하고 부활을 믿지 못하는가를 바울이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아그립바는 사두개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들 중에서 대제사장을 임명하였습니다. 유대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했고 바리새인은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학의 중심에 두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은 자신들이 믿지 않은 부활,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바울이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9~11절에서 자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위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투옥하고 죽였으며 외국까지 그들을 추격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자신에 대한 변론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중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내용들이 충분히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회심’인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이든 우리의 회심이든, 우리는 회심의 의미를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혹은 무종교로 흑백처럼 바꾸는 것으로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열심 있는 유대인으로서 믿었던 것, 그리고 이제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기초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믿음으로 살든 그렇지 않든, 그들의 인생은 사실 창조주 하나님께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회심을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하여 똑바로 안다는 것일까? 왜냐하면 바울 또한 회심하기 전에 어느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에게 열심인 자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심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시간 나는 새로운 피조물 즉 내 안에 성령님이 내재하고 계시는지를 느끼고 있는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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